고려시대 감옥은 초기에 있어서 태봉(泰封)의 제도에 의해 두어진 사법기관에 해당하는 의형대(義刑臺)의 관할이었다. 그 후 당의 제도를 모방해 백정(百政)의 개혁을 실시하고 형무기관으로 전옥서(典獄署)라고 하는 관아를 창설했다. 이것이 감옥이 독립된 하나의 관청으로 존재를 보게 된 기원이다. 또 의형대는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명칭 변경이 있었으며 형관(刑官), 상서(尙書), 전법사(典法司), 형조, 헌부(憲府), 형부, 이부(吏部) 등의 이름을 고쳐 고려 말엽에 이르러 형조라 했다. 그리고 전옥서가 언제나 관할 관청이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다.
전옥서는 수도의 중앙 옥으로 관제가 정하는 바에 의하면 죄수를 관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감옥이 각 지방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전옥서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전과 다름없이 사법권을 겸장(兼掌)하는 지방관 소속의 감옥에 지나지 아니했다.
수도에는 전옥서 외에 순금사옥(巡禁司獄)이라 불리는 감옥이 존재했다. 이것은 전옥서와 같이 관제에 따라 두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초기에 금위친병(禁衛親兵)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 설치된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내에 설치된 옥이다. 처음에는 궁궐 안 군령을 위반한 자를 여기에 구금했으나 중기에 이르러 조신(朝臣)으로서 임금의 뜻에 거역하거나 그르친 자도 직수(直囚)했다. 그 무렵부터 사대부의 고하를 막론하고 범죄를 한 때에는 모두 대옥(臺獄)에 수금했기 때문에 이 옥은 조옥(詔獄)이 되었다. 그래서 고려조 말엽에 이르러서는 벼슬아치의 옥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도(王都)의 보통 범죄자를 수용하는 감옥은 전옥서 하나뿐이었지만 960년(광종 11년)에 노예법의 개정을 기도하면서 노비를 안험(按驗)하고 그 옳고 그름을 변별하는 것으로 한 바, 노비지(奴牌志)를 얻어 고귀를 능역(淩轣)해 다투고 주인을 구함(構陷)했기 때문에 사회질서가 완전히 분란하기에 이르러 왕은 질서를 회복하는 수단으로 형옥(刑獄)을 엄하게 했다. 감옥은 그 때문에 왕람(汪濫)하게 되어 전옥서만으로는 수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임시로 감옥을 증설하고 이를 ‘가옥(假獄)’이라고 불렀다. 가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왕(景宗王) 때에 폐지해 끝났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