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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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료 선교사들 헌신·발전… 길마 선교사부터 레비 선교사

한삼열 선교사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길머(Dr. William Painter Gilmer, 한국명 : 길마, 이하 길마로 표기) 선교사가 원장으로 취임했다. 길마 의료 선교사도 다른 선교사 못지않게 인재 양성에 큰 힘을 기울였다.

때마침 목포선교부 조사로 활동하던 최병호 조사의 장남인 최섭은 영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병호 조사는 완도 출신으로 맹현리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가 활동할 때에 육지, 섬 가리지 않고 열심히 도우면서 맹현리 선교사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목포로 이사 오면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왔다. 시골에서 겨우 간이소학교를 다니다가 목포영흥학교에 편입을 하고 영흥학교에서 중·고등부를 다 마쳤다. 이때 길마 선교사는 자신의 후계자로 키울 욕심으로 그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진학시켰으며, 물론 학비는 길마 선교사의 몫이 되었다. 그는 방학 때라도 되는 날이면 충실하게 병원에서 조수로 길마를 도왔다.

그런데 길마 의사에게 개인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자신이 의사이면서 자신의 부인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큰 충격이었다. 길마 선교사는 1926년 선교사들의 중매로 목포선교부에서 부녀자들의 선교와 정명여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뉴멘(Miss Kate Newman) 선교사와 목포교회에서 결혼예식을 올리고 막 신혼살림을 꾸미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산후 조리를 잘못해 그만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길마 선교사는 1927년 사랑하던 한국 목포를 떠나고 말았다.

길마 선교사의 뒤를 이어 1927년 홀리스터(Dr. William Hollister)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그가 목포 지방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길마 선교사가 정성을 들여 교육을 시켰던 최섭은 의학을 이수하고 국가가 실시한 의사 시험에 합격해 목포 프렌치병원 의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프렌치병원에 부임하자 홀리스터 선교사는 군산 예수병원으로 옮겨 갔다. 최섭 의사는 얼마 동안 프렌치병원을 지켰지만 일제 말엽 프렌치병원이 문을 닫을 때에 목포 시민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면서 목포 제중병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진료에 임했다.

그 후 최섭은 해방을 맞이해 미군정 시절 초대 목포시장을 역임했으며 정명여학교를 재건하는 데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재건 초대 정명여학교 교장직도 역임했다. 그의 부친 최병호 장로는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을 당하자 고향 완도 관산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장로로, 전도사로 사역을 하다가 한국 전쟁시에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관산에서 순교했다.

광주 제중병원과 의료 선교사들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활동하던 노란 의료 선교사는 광주 제중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잠시 사역을 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08년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 후 광주 제중병원은 얼마 동안 중단된 상태였지만 1908년 윌슨 선교사가 광주에 도착하자 다시 문을 열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보의사 선교사가 책임지고 진료했던 여자 나환자는 얼마 동안 진료를 받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갔다. 그 후 윌슨 선교사는 일생을 광주 제중병원과 광주 봉선동에 있던 나환자 병원을 오고가면서 진료에 임했으며, 뜻하지 않게 영국 에든버러 나환자 기금을 받게 되자 나환자 병원은 생기가 돌았다. 그 후 광주 지역 주민들의 건의를 받아 여천 신풍리에 나환자의 천국 애양원을 설립하고 광주 나환자 병원을 그곳으로 옮기고 광주와 여천을 드나들면서 나환자의 좋은 친구가 되어 일생을 헌신했다.

그런가 하면 1922년에는 치과 의사인 레비(Dr. J. K. Levie) 선교사가 광주 제중병원에서 사역했는데, 제중병원으로 오기 전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군산 예수병원에 부임했다. 군산에서의 활동은 대단한 인기였다. 그전에 혹시라도 선교사나 그의 가족들이 치과 치료를 받으려면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후 레비 선교사는 군산 예수병원에서 치과를 개업하는 것보다는 호남 지방 선교사들의 중심지역인 광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해 얼마 후에 광주로 옮겼다.

광주 제중병원은 전주나 목포, 군산이나 순천 어디서든지 왕래가 편리했다. 그래서 그는 광주에 정착하면서 진료에 임했는데 뜻하지 않게 그에게 많은 일감이 몰렸다. 레비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 오원기념각에서 모이는 남자 대사경회나 여자 대사경회에는 어김없이 참석해 구강에 대한 강의를 하고, 충치 있는 환자들을 바로 그 옆에 있는 병원으로 불러모아 치료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계속 상승해 갔으며, 이 일로 토요일만 되면 간단한 치과 의료기구 몇 점을 챙겨 들고 순회 진료를 실시했다.

그의 진료를 받기 위한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날은 한두 달이 아니라 1년 내내 이루어졌다. 그의 부인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자녀들은 다섯 명이나 되었는데 부인이 남편의 뒷바라지와 업무에 시달리다 그만 다섯 자녀를 남편에게 맡기고 1931년 광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레비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와 광주 제중병원 동료 직원들의 애도 속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그의 시신을 광주 양림동 양림동산 햇살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곳에 안장했다.

그후 레비 선교사는 자녀들과 함께 잠시 귀국했다가 돌아와서 의사가 부족한 순천 알렉산더병원으로 일터를 옮겼고 순천을 비롯해서 승주, 구례, 광양, 여천, 고흥, 보성 등지를 다니면서 충치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얼마 동안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사역하던 노란 의료 선교사가 1905년 광주로 이거했다. 원래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오원 선교사가 있었지만 그는 신학을 연구했던 의사였기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포에서 의사로서 목사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광주로 이거한 후 1년간은 의사 겸 목사로서 활동을 했지만 1905년 가을부터는 목사로서 선교에 전념했다. 그래서 노란 의사가 광주에 오게 되었는데 얼마 있지 못하고 광주를 떠났다. 그를 통해서도 광주 지방에 있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노란 선교사가 건강을 지탱하지 못하고 떠났다고 하면 당시 의료 선교사나 일반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오원 선교사는 광주로 이거하면서 전남 내륙 지방인 화순, 나주, 보성 지방 등을 다니면서 교회 개척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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