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기둥과 정초석이 말하는 침묵의 역사
일제의 흔적·해방의 상흔 간직한 서울 YMCA 회관
YMCA (3)
이곳 YMCA건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여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건물 뒤편으로 나가자마자 주차장으로 가기 전 왼쪽에는 낯선 돌기둥 하나가 유리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있다. 관심을 갖고 보면 의아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그냥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언젠가부터 유리 상자를 만들어 씌워놓았다. 온갖 먼지가 뒤덮여 있던 것이 보기에 안 좋았기 때문인지 유리 상자를 씌워놓았지만 왠지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곳에 멈춰 유심히 살펴보는 것을 권한다.
이 돌기둥은 높이가 2m 정도가 된다. 사각형 기둥인데 정면에는 <私立 朝鮮基督敎靑年會學校>라고 새겨져 있고, 그 오른쪽 면에는 <靑年會學校>, 왼쪽 면에는 <靑年會學館>, 그리고 뒷면에는 <主後 一千九百十四年三月三十日 卒業生紀念 中學科 英語科>라고 새겨져 있다. 이 돌기둥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특히 우리 근대사의 아픈 단면을 보게 된다. 이 돌기둥은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일제에 의한 강제통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돌기둥은 단지 YMCA의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YMCA건물은 1967년 새로 지은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건물이 6·25동란 때에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휴전 이후 국제적인 도움으로 학습장과 호텔을 운영할 수 있는 현재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6·25동란 이전의 건물은 1908년 12월에 준공한 3층짜리 붉은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양식의 독특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유명한 건물로서 명성을 갖고 있을 만큼 규모나 모양이 특별했다. 그 건물은 주로 학습실로 사용했고, 목욕탕과 식당, 강당, 체육관, 사무실 등 YMCA의 사업과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왜 건물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가? 이 돌기둥을 세운 주체가 이곳에서 공부한 졸업생들이기 때문이다. 즉 정규학교는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 졸업을 하면서 모교에 남긴 기념물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일일이 추적할 수 없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전 이곳은 정규학교가 아니면서도 많은 일꾼들을 배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돌기둥은 왜 거기에 서 있는 것일까? 사실은 6·25동란 이전까지 그 자리가 분명했다. 하지만 동란의 과정에서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의 잔해로 묻혀있던 것을 휴전 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 재건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서는 이 돌기둥 하나에 담긴 역사적 의미보다는 세워둘 수 있는 공간이 아쉬웠다. 따라서 그냥 버릴 수도, 그렇다고 어디다 사용할 수도 없는 애매한 돌기둥이었다. 그러나 버릴 수는 없기에 한적한 곳에 세워두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는 그나마 유리 상자를 씌워서 먼지라도 앉지 못하도록 해 둔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이 돌기둥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경험했던 아픔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돌기둥인데 그 몸통에 새겨진 글씨를 찬찬히 읽어보면 같은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왠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사립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라고 된 글씨를 보면 ‘학교’의 ‘校’자가 돌이지만 글씨를 파내고 다른 돌에 글씨를 새겨서 집어넣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본래 ‘館’자였던 것을 일본제국주의 통치가 한참이던 1930년대에 들어와서 ‘館’자를 파내고 ‘校’를 새겨서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는가? 일본이 민족교육과 자립과 독립정신을 교육하는 기관인 YMCA의 교육시설을 통제하기를 원하지만 이 시설이 정규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학교 설립허가를 YMCA의 입장에서는 결코 원하지도 않음에도 강제로 인가를 해주었다. 강제로 설립인가를 한 다음 학교에 세워져있는 돌기둥에 글자를 ‘學校’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이 YMCA의 교육을 통제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 돌기둥에 새겨진 ‘관’을 ‘교’로 바꾸어놓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한일병탄 이후 일본이 조선을 통제하는 방편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것이기도 하다. 천황의 교육칙령은 식민지의 국민도 천황의 국민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명분을 앞에 두고 실제로는 학교를 철저하게 통제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정규학교로 인가를 받았지만 통제가 안 되면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폐교를 하거나 강제로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반대로 정규학교가 아니라 학관(學館)이라는 이름으로 교육하는 곳을 통제하기 위해서 허가를 강제하는 일도 자행했던 사실을 이 돌기둥 하나가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아픔이 남겨져 있다. <사립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라는 글씨에서 다시 ‘조선’이라는 글씨를 보면 알아볼 수는 있지만 글씨 자체가 훼손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6·25동란의 과정을 겪으면서 누군가가 조선이라는 글씨를 뭉갠 것이다. 어렴풋하게 알아볼 수는 있지만 ‘조선’이라는 글씨를 뭉개서 지우려고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이라는 글씨가 뭉개지게 된 것은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념적으로 좌·우로 나뉘어 치열한 경쟁, 정쟁,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때 공산주의자들이나 북한이 공식적으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함으로써 우익쪽의 사람들은 조선이라는 글씨나 말만 들려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우익에 속한 사람들이 이 돌기둥에 새겨진 ‘조선’이라는 글씨를 뭉갰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돌기둥과 거기에 새겨진 글씨는 아무런 말이 없다. 다만 그 사실은 몸에 담고 묵묵히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