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남궁혁 목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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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혁 목사, 신사참배 거부와 신학적 헌신

6.25 납북·순교, 한국의 본회퍼 같은 신학자

1938년 9월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4개 선교부에서 함께 운영하던 장로회신학교를 폐쇄했으며, 선교사 교수들은 모두 철수했다. 남궁혁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맞서서 1938년 9월 20일에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이름으로 당시 일제가 국민의례라고 호도하던 신사참배를 결연히 거부했는데 그 결과 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는 슬픔을 겪었다.

그는 신학교가 폐교된 후에도 <신학지남>의 편집 주간의 책임을 계속 감당했다. 그러나 1940년 10월 25일자로 <신학지남>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남궁혁 목사는 다음 해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신학 사전 편집과 <신학지남>을 교열하면서 거류민단 단장을 맡아 교포들의 생활을 돌보며 함께 눈물 흘리며 위로하다가 해방이 되어 1946년 동포들과 함께 귀국했다. <신학지남>을 계속해서 편집하고 연구하는 것은 신학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귀국하자 그는 미국 군정청의 적산관리청장을 맡았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관리하고 처리하는 중대한 직책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책임이었다. 거기에는 총독부의 재산을 비롯해 공공기관이나 개인의 재산과 소유권 처리 문제, 일본 신사 관계의 재산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사실 우리 교회들도 일본 신사나 신도 종교의 재산들을 일부 불하받아 교회를 시작한 곳이 여럿 있었다. 해방 후 미 군정하에서 정부의 적산관리청장으로 부임해 공무를 집행하다가 재무세관 국장, 목포 세관장, 재무부 세관국장직을 연이어 수행했다.

그 큰일을 해방 후의 혼란과 부패의 시기에 처리한다는 것은 신학 박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그 자리를 사임했다. 1947년 1월 그가 한때 세관에 있었다는 경력 때문에 한국 과도정부의 재무부 세관국장에 임명되었고, 신성 대한민국의 세무행정의 체계를 세운 뒤 교회 본연의 업무에 돌아가기 위해 1948년 사임한 것이다.

항일운동으로 일경에 쫓기는 이승만을 집에 숨겨주고 해외로 망명시키기까지 한 그였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교회 연합에 묵묵히 헌신했다. 남궁혁 목사는 끝까지 의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후에 한국 기독교협의회 총무직을 맡아 어수선했던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에 힘썼다. 그리고 194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 기독교대회에 참석해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1950년 8월 23일 장로로 가장한 한 공산당원에게 유인되어 북한에 납북되었다. 장병욱이 쓴 ‘6·25 공산 남침과 교회’에 의하면, 남궁혁 목사는 납북 이후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이라고 대공방송을 강요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남궁혁 목사는 평양, 군무리, 영변 등 북한 여러 지역을 거쳐 1958년 강제노동 수용소인 양강도 지역의 한 목재사무실로 이송된 후 물도 마시지 않고 입을 다물고 금식하다가 쓰러져 순교했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미망인 김함라 권사는 서울 남대문교회에 출석하다가 생을 마쳤다.

순교자는 자기의 강한 믿음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순교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남궁혁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달란트를 성실하게 감당했다. 그래서 그 뜻에 복종한 것이 순교였다. 그의 눈에 스데반 집사가 본 것같이 하늘이 열리고 주님이 일어서신 것을 보며 기쁨과 감사로 주님 계신 곳으로 올라갔다.

남궁혁 박사는 한국의 본회퍼와 같은 신학자였다. 본회퍼가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신학자의 살아 있는 양심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이라면 남궁혁 박사는 구한말에 의지할 것 없던 민심을 달래고 조선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3·1 독립운동에 나섰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침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어 금식기도를 하던 중에 순교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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