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른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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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픔 (2)

그러다가 가끔 소고기 건소매 국이 나오는 날이면 고아들은 “야! 고깃국이다”라고 함성을 질렀다.

때로는 통조림 생선 한 토막이 나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고기다!”라고 소리지르며 좋아했다.

내 작은 삶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통조림 생선이나 고깃국이 나오는 날이면 힘센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다음에 미군들이 초콜릿이나 사탕, 과자, 빵을 갖다 주면 그때에 내가 너 줄테니까 이 고기 나 줘라”하면 어린 고아들은 힘센 아이들에게 다 주게 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고깃국으로 만든 수제비가 나오면 힘센 아이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다음에 쌀밥 나오면 너 줄테니까 이 수제비 반만 줘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 듣고 배고픔을 참아 가면서 반 이상을 덜어 주곤 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몇 번이나 그렇게 속아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곧 좋지 못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밥을 빼앗긴 아이들은 밤늦게 부엌에 가서 솥 안의 밥을 몰래 집어다가 마루 밑에서 먹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방에 있는 친구 둘이 밥을 갖다 먹자고 나를 꼬셨다. 나도 그때 배가 너무 고파서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솥을 열어 보니 밥이 여러 그릇 있었는데, 그 밥은 밤에 야근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같이 간 친구가 내게 너도 한 그릇 먹으라고 집어줘서 그것을 가지고 넓은 절간의 강단을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있던 방은 뒷골목에 있었는데 거기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되는 꽤 먼 거리라고 생각된다. 친구들하고 조심조심 가고 있는데, 그 고아원의 규율을 담당하고 있는 석 선생님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

그는 평소에 나를 참 좋게 보는 분이셨다. 그러나 한 번 걸려들면 몽둥이로 반 죽다시피 때려서 고아원에서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분이었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찰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때마침 전깃불이 켜 있지 않아서 약간 어둑어둑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단추를 풀고 밥그릇을 앞가슴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게 걸어갔다.

웬일인지 그날 밤에는 석 선생님이 부드럽게 “너희들 밤늦게 어디 갔다 오니? 일찍 들어가서 자라”하시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와 두 친구들은 ‘살았구나’ 하고 안심한 뒤 고목 밑에 앉아서 손으로 그 밥을 다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우리 손 안에 밥그릇을 석 선생님이 못 볼 리는 없었다.

두 친구들은 “아마도 석 선생님이 너를 봐서 손에 든 밥을 못 본 척해주셨나 보다”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석 선생님의 눈을 잠시 감겨주신 게 아닌가 하고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고아원에서는 도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이러한 생활상들이 바로 6·25 전쟁 직후 고아원의 모습이었다.

내가 고아원 생활을 할 당시 가장 후회되었던 일은 잘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아이가 가진 젤리 하나를 빼앗아 먹었던 일이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움의 가시로 남아 있다. 그 아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안다면 몇만 배라도 갚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도 그 앉은뱅이 아이를 그리면 불쌍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의 얼굴을 적시곤 한다.

그때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사람은 죄를 짓지 말고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개소리도 천사의 소리처럼

어느 추운 겨울날 경상북도 어느 깊은 산골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해는 서산에 지고 날씨는 점점 추워져가는 저녁 때였다. 나는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고 난 후에 주인에게 “혹시 댁에서 하룻밤을 재워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집의 따뜻한 안방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소죽 끓이고 난 아궁이 앞에서라도 재워주었으면 하는 간청을 했다. 밥은 한 숟갈씩 주었지만 잠을 재워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어느 집에 가니까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내게 이곳으로부터 얼마 안가면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막도 있고 사랑방도 있어서 누구나 쉬고, 자고 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그곳을 일러주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노인의 말대로 어둠을 뚫고 그곳으로 찾아가기 시작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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