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인생 황혼기 아니라 새로운 꽃 피우는 계절
우리 사회에서 ‘은퇴’는 오랫동안 인생의 마침표처럼 여겨져 왔다. 직장인은 대부분 60세 전후에 정년을 맞고, 교회에서는 교회법에 따라 70세가 되면 장로·권사·집사 등 모든 직분을 내려놓는다. 많은 이들은 “이제 충분히 일했으니 쉬라”는 말을 자연스러운 위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제 은퇴가 개인에게 남기는 감정은 생각보다 복합적이다. 직책은 내려놓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지탱해 온 역할과 정체성까지 함께 사라지는 듯한 허전함을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은퇴 직후 몇 달간은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아침마다 출근할 필요가 없고, 오랫동안 미뤄둔 여행이나 여가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갈 곳이 없다”, “할 일이 없다”, “하루가 너무 길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과 함께 사회적 관계도 빠르게 줄고, 그 자리를 공허함과 불안이 채운다. 30~40년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갑작스러운 단절을 맞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 수십 년 동안 직장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경험과 기술, 인간관계, 내공을 쌓아 온 은퇴자들은 단순한 ‘퇴직자’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쉽게 만들 수 없는 고급 자원, 즉 ‘사회적 자산(social capital)’이다. 기업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도 얻기 어려운 ‘실전 지식’과 ‘현장 감각’을 이미 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 귀한 자산을 은퇴와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취급해 왔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이제 은퇴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은퇴는 사회가 이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이미 ‘액티브 시니어’ 정책을 통해 고령층이 지역사회 문제 해결, 청년 멘토링, 돌봄, 자원봉사, 사회 참여의 중심에서 활약하도록 돕고 있다. 은퇴자는 단순 봉사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역량을 높이는 핵심 인력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은퇴한 장로·권사·집사들은 교회 교육, 신앙 상담, 청년 멘토링, 지역 섬김에서 누구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들의 신앙의 연륜과 삶의 지혜는 젊은 세대가 쉽게 얻을 수 없는 보물이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영적 자산이다. 교회의 사역은 직분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쌓아온 지혜와 신앙의 깊이에서 비롯된다.
얼마 전 만난 김유경(73세) 장로님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30년 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은퇴한 후, 한동안 운동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집 근처 주민센터에서 행정 도움이 필요한 민원인을 자원봉사로 돕기 시작했다. “요즘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다”는 그의 말에서 은퇴 이후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지역을 섬긴다는 것은 크고 거창한 일이 아니라 눈앞의 작은 필요에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일임을 다시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은퇴를 ‘종료’가 아닌 ‘전환’으로 이해하는 순간, 은퇴자는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지역사회·교회를 다시 세우는 동력이 된다.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다음세대와 지역사회에 나누는 그 순간, 은퇴는 인생의 황혼기가 아니라 새로운 꽃을 피우는 계절이 된다.
은퇴가 개인의 외로움으로 끝나는 사회가 아니라은퇴가 공동체의 힘으로 이어지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박용창 장로
<사회복지칼럼리스트, 제삼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