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탄압 속에서도 신앙 지킨 평양신학교
공산당 정권은 신학교를 자기들의 수중에 넣기 위해 소위 북조선 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을 독촉했다. 그러나 교장은 “신학교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등록되어 있으니 지상 나라에 등록할 필요가 없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있을 공산당도 아니었다. 공산정권은 전직 목사 강양욱을 시켜 교계 일부 인사들을 포섭해 교회 안에 내분을 일으켜 파괴 공작을 펴기로 계획했고, 그 기관으로 ‘기독교도 연맹’이라는 것을 출현시켰다.
이에 공산당은 신학교 교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교역자 또는 신학생까지, 더구나 평신도들도 가입을 강요하는 공작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교장이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을 거부했음은 물론 교수, 학생들까지 그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북한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싸우는 첫 단계였다.
기독교도 연맹의 주동자인 강양욱은 1943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본 교단의 목사였다. 그런데 김일성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신앙과 사상을 넘어 북한에서 강력한 공산주의 사상가로 나타나 북한의 교회를 탄압하고 말살하는 데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핍박했던 인물이다. 강양욱은 자기의 신학교 선후배를 막론하고 누구든 잔인하게 살해하는 데 공산주의자들을 동원했다. 그는 신앙이 아니라 권력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신학교 건물도 압류했다.
이런 파국에 이성휘 목사는 경건회 시간만 되면 2층 본당 예배실에 올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조국의 통일을 위해, 신앙의 자유를 위해, 투옥된 종들의 자유를 위해, 학생들과 하나되어 하나님께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때 이성휘 목사는 늘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광의 임금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임금이 뉘시냐?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여호와시로다”(시 24:7-8)라는 말씀을 힘차게 암송하곤 했다. 이는 환난과 핍박의 시기가 지나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참고 기다린다는 신앙고백이었다.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를 가장 많이 불러서 보지 않아도 다 따라 외우면서 눈물과 결심으로 부르곤 했다.
그때 북한에는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 두 곳에서 복음화 운동의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이 두 신학교에는 60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어 생명을 걸고 진리를 탐구하는 생활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산정권은 이러한 신학교가 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공산주의 사상에 화약고와 같다고 생각했다. 북한 민주사상의 중심체 역할을 했던 평양신학교가 눈엣가시와 같으나 한 번에 폐지할 수는 없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