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내 길의 한 줄기 빛 이만영 장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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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터전인 도림교회(4)
유병관 목사와의 만남
– 유병관 목사의 신앙 경력

유병관 목사는 황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갔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한 유병관 목사는 당시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를 정성껏 간호하여 회생시킨 사부댁 할머니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 문중의 반대로 어렵게 교회에 다니다 문중의 눈 밖에 났고, 결국에는 거의 쫓겨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병관 목사는 영동 지역 순회전도를 하던 선교사 소열도의 도움으로 청주로 갔다.
소열도(T.S.soltau) 선교사는 미국에서 출생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1914년 9월 16일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만주지역 한인선교를 담당하며 평북 선천에 주재하였다. 1917년까지 만주의 흥경선교지부 설치를 주도하면서 크게 활약하는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충북청주선교지부로 이전하여 활동하였다. 청주제일교회 부설 초등학교 교장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하면서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참배를 반대를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후 계속 한국의 선교 상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한국전쟁이 마무리되는 1952년 한국을 다시 찾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목회 활동을 펼치면서 대구 장로회신학교와 청주 선교지부를 방문하여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선교활동의 기틀을 다시 마련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 청주에서는 청주고등성경학교가 있었는데 유병관 목사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영등포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서울에서 사역에 매진하다가 1940년 승동교회에서 개교한 조선신학교로 전학하여 1942년 졸업하였다. 이후 유병관 목사는 응암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6년 4월에는 응암교회를 사임하고 당산동교회를 맡았다가 1947년 3월 도림교회로 부임하였다.
유병관 목사는 1947년 도림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7년간 목회하고, 1947년 11월 15일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1974년 비교적 자세하게 그의 목회 활동과 개인생활을 일기에 담았다. 이를 통해 그의 목회 철학과 교회를 이끌어 나간 중심적인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유병관 목사의 믿음은 이만영 장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유병관 목사의 목회철학

1974년 1월 1일 유병관 목사는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기도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고, 깊고, 완전하신 뜻을 깨달아 취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내용이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해 나감으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기도와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착실하게 해 나가면 자신이 처해 있는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고유한 사명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 역사의 창조는 바로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의 발견’과 ‘믿음의 실천’이 유병관 목사의 목회 철학을 지탱하는 거대한 두 기둥이었다.
1월 4일 일기에는 이민을 가야 하는 유병관 목사의 심경 속에서 이 땅에 대한 유병관 목사의 생각이 담겨져 있다. “이민을 꼭 가야 하나? 내 강산 내 일터를 정말 떠나기 싫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내 강산 내 일터는 하나님이 유병관 목사에게 줄로 재어 주신 기업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사명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시점이 도래하였다. 그 심정은 단 한마디로 서술되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유병관 목사의 목회 철학과 도림교회를 이끌고 나간 중심적인 내용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직원 취임식에서 거행된 선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나의 직무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믿고 소중하게 섬기겠다. 나의 직무는 기도와 성경, 전도에 충실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줄 믿는다.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예배 출석, 교회 봉사, 성도의 교제에 힘쓰겠다.
-유병관 목사의 일기 1974년 1월 6일-

또한 유병관 목사의 전도 활동에 대한 입장은 ‘백발 노부부가 요한을 잉태하고 처녀가 수태하여 예수님을 탄생케 한 것과 같은 위대한 생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교인들의 전도 활동이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적인 활동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전도 사명을 통해 장차 그렇게 탄생된 한 믿음의 성도가 위대한 일을 하게 되리라는 믿음의 전망이었다.
이것이 유병관 목사의 전도관이었다. 그가 평생의 목회를 통해서 꾸준하게 밀어붙인 모든 목회 활동과 노력들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이것이 곧 유병관 목사가 생각하는 도림교회 성도들이 지녀야 할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반드시 공동체의 신앙을 기반으로 서 있는 믿음이었다.
유병관 목사가 말하는 공동체의 믿음은 마가복음 2장 1~12절에 나타나는 내용에 근거하고 있었다. 공동체의 신앙은 첫째,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신앙, 둘째, 서로 사랑하는 신앙, 특히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신앙, 셋째, 협동으로 난관에서 건설하는 신앙이었다. 교회라고 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공동체를 위한 하나 되는 신앙이 아니라 훨씬 더 보편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신앙이 강조되고 있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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