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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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48)

배위량 탐구와 연구를 위한 길 위에서의 변명(辨明)과 회오(悔悟) <5>

고해(苦海)와 같은 길이지만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용기는 인간의 삶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위대한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나서는 일이 결코 싶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틀을 깨는 것을 싫어하고 몹시 두려워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보면 ‘새가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알을 깨어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인 데미안은 인간의 마음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과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청년 시절은 이런 문제에 사로잡혀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 속에서 청년세대가 자신의 내면 깊숙히 파고드는 아픔과 고뇌를 해결할 기회를 찾길 기대한다.
이 작품에서 헤르만 헤세는 인간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듬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낮과 같은 현실과 밤과 같은 현실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지성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몰지각한 생각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인간 현실이다. 헤르만 헤세는 고뇌하는 청년의 내면을 다룬 데미안을 통해 지각하지 못하고 살면서 서로 대립하고 부대끼는 인간 존재를 그리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인간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두 가지 대립적인 세계 속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데 두 세계 속에 처하여 대립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 두 세계 중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아가면서 고독하게 방황하는 부류도 있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어디에도 끼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더듬어 보면서 자신이 잊고 살았던 세계에 대한 갈망을 다루고 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무능한 존재이다. 이 근원적인 무능함은 아담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하나님이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26-27; 참조. 고전 11:7; 엡 4:24; 골 3:10; 약 3:9)을 잃어버린 데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 속에서 보면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불완전하고 제한된 시공(時空)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고뇌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몸부림이다. 이러한 몸부림은 잃어버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고뇌를 고독하게 경험하면서 성숙해 간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아프게 바라보면서 그것을 향하여 다가가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묘사한다. 데미안에서 지치도록 고뇌하고 갈망하는 고뇌를 통하여 헤르만 헤세는 그 고뇌가 인간 스스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이르는 길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쉽게 감각적인 생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자신과 관계를 맺은 것들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통상 인간적인 삶의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 한정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용(善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출발점이 아닐까!
배위량! 그가 누구이기에 성서학자로만 살아도 너무 바쁘게 살아가야 할 필자에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까지 소환하게 만드는가? 필자는 배위량을 안 뒤에 주저 없이 그를 위해 시간을 내어 역사책을, 지리책과 한국 근대의 건축과 문화와 예술에 관한 논문까지 읽었고 그것에 관한 논문이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더운 여름철에 산 넘고 물을 건너 걷고 또 걸었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운 겨울철에 새벽밥을 먹고 배낭을 메고 부산으로 물금으로 구미로 상주로 가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하룻길을 걷고 대구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 오기도 하고, 여관에서 잠을 자면서 계속 순례를 하기도 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찬 서리 내리고 찬 바람 부는 산마루를 타고 고갯길을 걸으면서 인생의 고단함을 몸소 느끼기도 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동명으로 가서 구미까지 걷고자 길을 나섰다. 첫 길이라, 새벽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어 또 넘어 걷고 하면서 길도 잃어버리고 찾고 하면서 방향을 유지하여 걷는 동안 지치고 힘들었다. 새벽에 먹었던 아침 식사가 지탱해 준 에너지가 고갈되어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바람이 잦아드는 골짜기로 찾아 내려가 가져온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날이 너무 춥고 그날 따라 겨울에 무슨 태풍이 불어오듯 산중의 나무들이 흔들린다. 골짜기로 찾아 들어가니 바람이 많이 조용하다. 그러나 겨울 골짜기는 너무 춥다. 도시락을 먹는데, 속으로 돌을 삼키는 것 같이 속이 아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갯마루 길을 돌아서 신작로 길을 따라 나온 후 만난 황학고개를 넘어갈 때 이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구미까지 가야 오늘 일정이 끝나는데,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겠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산중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민가(民家)를 찾아 그 집 현관문 앞에서 염치없이 문을 두드리고 길을 물었다. 산중 마을에 사는 젊은 새댁이 초면인 필자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아기를 안고 나왔다. 필자의 행색을 보고 “어르신 이렇게 추운 날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동명서 여기까지 걸어오신 것만 해도 대단합니다. 여기서 구미까지는 그 길의 2-3배는 될 텐데 이미 거기까지 걸어서 가기는 늦었습니다. 제가 차로 동명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오늘 순례는 여기서 그만 두시고 다음 따뜻한 날 다시 와서 순례를 하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린다. 필자는 그때 “모처럼 시간을 내어 여기로 왔고 오늘 못하면 언제 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기에 오늘 해야 됩니다”라고 그 새댁에게 대답하니, “점심은 드셨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오다 바람이 잦아드는 골짜기를 찾아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나를 측은히 바라보면서 “이 추운 날씨에 한데서 드셨느냐,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시고 가시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내온다. 이렇게 나는 그날도 지극히 선하고 복된 이웃을 만났고 그를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했다.
현대의 인심이 ‘야박하다’ ‘어떻다’ 말하기도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보기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에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후 선하게 보셨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각자에게 맡겨진 과제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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