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계점,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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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한 해였습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은혜로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해는 걱정과 근심, 염려와 불안으로 점철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걱정으로 해결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새해를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더어려워질 것이다, 더 힘든 일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넘어서기 힘든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넘기 힘든 능선도 있었습니다. 한계점에서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 한계점이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긍정적 이해가 전제된다면 거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 미래 예측과 부정적 예측이 있습니다. 부정을 넘어서면 긍정이 다가서고, 긍정을 외면하면 부정의 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희망이 없다, 다 끝났다라는 말을 듣노라면 밥맛도 없고 잠자리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길이 있다, 해법이 있다라는 말을 듣노라면 힘이 솟습니다.
물론 무의미한 낙관이나 태평성세론에 휩쓸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상황은 정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하다간 붕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앙과 역사관을 갖느냐에 따라 막장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큰 수술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다 끝났다, 삶을 정리해야 한다라며 포기할 수도 있고, 아니다 넘어서야 한다, 할 일이 남아 있다라며 제2의 도약점으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갈구했습니다. 그리고 메스를 대고 환부를 드러냈습니다. 의사는 싸매고 하나님은 치료하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응답의 은혜로 20년이 지난 지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는 종점입니까?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여기는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그 자리가 지금 여기입니다. 다시 출발하면 됩니다.
우리 앞에 출발과 포기라는 두 가지 기회가 놓여있습니다. 어느 쪽을 고르느냐는 것은 내 몫입니다. 그리고 선택에 따라 지향점이 달라지게 됩니다. 어느 때인들 위기가 없었습니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예술이 통전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태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내성이 약해지고 유아 시절로 회귀하는가 하면 세속과 친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이 필요합니다.
노련한 선장의 진가는 파도가 넘치고 폭풍이 드셀 때 드러납니다. 노련한 알피니스트의 경륜은 알프스를 오를 때 빛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위기를 극복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모진 고난과 박해에 맞선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던 것처럼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가는 곳에 국가가 간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정신사의 기둥을 바로 세우고 그 시대를 견인할 때 교회도 그리고 국가도 건강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미로를 헤매고 지도력을 상실하면 교회도 타락했고 그 시대도 어두워졌습니다. 중세교회가 그 실례입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는 것은 채광이 어두워졌다는게 아닙니다. 교회가 어둠을 만들고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개혁운동은 세상을 밝히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불 꺼진 교회를 밝히고 교회 안에 짙게 드리운 흑암을 내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암흑 탓을 밖에서 찾은 게 아니고 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이치는 동일합니다. 내안의 등불을 밝히고 교회의 등불을 밝게 점화해야 합니다.
어떤 날 밤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왜 등불을 들고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다른 사람이 등불을 보라고 들고 있소이다”였습니다. 교회가 등불을 높이 들면 충돌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내가 등불을 밝히면 다른 사람을 옳은데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내가 책임자이고 교회가 책임자라는 얘기가 됩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순환법칙입니다. 되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한 해는 가고, 새해가 오고 있습니다. 2020년이 끝나는 거기가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바로 거기가 반전 포인트입니다. 패배주의는 반드시 패배합니다. 패배주의 사전에 반전이나 출발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하는 사람들 사전에는 출발이라는 단어가 살아 움직입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떠났던 곳이 종점이고 종점이 출발점입니다. 사도행전 1:8의 땅끝도 복음의 출발점이었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2020년을 마무리 하고 새해를 맞는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바르게 서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아 점검과 정립이 이뤄져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결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물량 주의에서 영성 중심으로 외형에서 내실로, 외곽에서 중심으로, 비본질에서 본질로, 자아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항공모함은 파도를 겁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각배는 잔물결에도 흔들립니다. 믿음은 항공모함보다 더 크고 강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는다면 그 어떤 도전도 겁날게 없습니다.
새해, 우리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합시다. 금관, 목관, 현악, 타악기가 어우러져 장엄한 음악을 만듭니다. 각각 제 소리를 내지만 위대한 화음으로 명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린 다 각각 다른 일터에서 다른 일을 합니다. 생각도 판단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봉을 바라보고 멋진 연주를 엮어 냅시다.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전제는 내가 말한다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였습니다. 새해 내가 한다라고 말하지 말고 주님이 하십니다로 시작합시다. 주눅 들지 말고 새로 출발합시다.

/박종순 목사(증경총회장, 충신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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