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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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냐 아니냐가 화두가 되었다. 이런 질문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고, 또한 미약하나마 삶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과 관점은 조금 달리 묻고 싶었다. 하나님의 심판의 유무보다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참담한 현실에서 믿음의 정체성을 재정립함으로 계기를 삼아 이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필요를 느낀 것이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16:8) 이 말씀은 사래의 몸종인 하갈이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한 후에 여주인을 깔보고 무시하자, 사래가 남편의 동의를 구한 후에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하갈은 그 매질을 견디다 못해 광야로 도망간 것이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이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현재와 미래가 보장된 언약의 백성에게 묻던 말씀이 아니라, 하갈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주인의 씨를 잉태하였으나 주인의 유업을 이을 수가 없는 본류(本流)에서 밀려난 자들, 주류가 되고 싶으나 주류(主流)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 삶의 좌표를 설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자들, 그리고 연속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주저앉은 자들에게 삶의 주권자이신 전능자가 묻는 질문이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은 그 뿌리와 근원을 묻는 것이고,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삶의 목적과 목표를 뜻하는 것이다. 두 관계는 서로 엮여 있어 분리해서 다룰 수 없는 질의이고,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시작을 하였든지, 그 시작의 뿌리가 어디였는지를 되살펴 보라는 말씀이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을 하였고, 어떤 정신과 믿음으로 시작하였는지 그 뿌리를 궁구(窮寇)해 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미래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삶이든, 사업이든, 열정이든, 스펙을 쌓는 일이든 그 시작의 뿌리와 근원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공을 들여 쌓아왔던 것들이 한 날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많은 것들을 앗아 갔고, 지금도 그 남은 것마저 앗아 가고 있다. 손과 발이 다 잘린 것 같고, 숨이 턱에 닿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절규하게 만든다. 돌이켜 보니 내게도 한때는 번성하던 때가 있었고,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거리가 있었고, 맡은 직책의 신선함을 마음껏 누리던 때가 있었지만, 그 많은 기회와 그 뜨거운 열정을 다 소진해 버린 초라한 자신을 되살펴 보게 한다.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나라 곡간의 구휼 미(救恤 米)를 기대할 것인가? ‘코로나19’가 기적같이 종식되기를 기대하는가? 어느 쪽이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새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소망이 있는가?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여주인에게 돌아가 십수 년을 그 수하에 복종하였고,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이 장성한 후에는 기업의 본류에서 밀려나 광야로 내몰리게 되지만, (그가 나올 때 떡 몇 덩이와 물가죽부대 밖에 없었고, 물이 떨어진 후에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아이와 함께 통곡하며 울부짖는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열어 물 샘을 보게 하셨고, 그 아이 이스마엘은 큰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나만의 물 샘을 발견하시라!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진 이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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