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발언대] 노인과 늙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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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속담에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는데 아프리카에 어떻게 그런 속담이 생겼을까는 궁금하지만, 많이 생각하게 하는 속담이다. 노인의 죽음은 그가 알고, 사랑하고, 체험했던 한 시대의 생생한 체험이 사라지는 것으로 도서관까지는 아닐지라도 큰 손실이다. 역사는 후세 사람들이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서 남길 수 있을지라도 살아 있던 허다한 무리의 증언만큼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노인들에게 준 사명은 주어진 자리에서 이생의 탐욕을 버리고 주님 닮은 삶을 살고 간 생생한 기록을 남기라는 게 아닐까?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광복과 6·25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역사로 인식하고 살아온 사람이며, 교회에서는 초창기부터 현재의 목회자까지 교회의 역사를 함께 창조해 온 산 증인이 지금의 노인이다. 직장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은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일이었다. 그렇게 산 노인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하고 사라지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받은 은혜는 이제는 노인이 되어 받은 은사를 따라 생명의 강으로 밖으로 흘려보낼 때다. 한 사람의 외침은 자기주장이지만, 공감을 얻은 여러 사람의 외침은 소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성경의 히브리서 12장 1절은 믿음으로 승리한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며 우리도 인내로 예수를 바라보고 경주를 하자고 말하고 있다. 비록 노인은 약할지라도 돌담 밑에서도 주신 생명을 자랑하고 주어진 대로 한껏 피어오른 제비꽃처럼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외치며 허다한 증인 속에 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가 많아지고 물리적으로 늙은이가 되어 사는 모습은 노인과는 대조적 삶이다. 얼마 전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마스크를 손에 든 채 쓰지 않고 승차하려는 노인을 지하철 보안관이 저지하자 코로나 접종을 다 마친 사람이라며 젊은 보안관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흘 후 그 노인은 경로사상이 없는 그 보안관에 화가 나서 다시 그 역사로 찾아가 당시의 보안관을 찾아 따지고 뺨을 때려서 입건되었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묻혀 살며 자기만 옳다는 고정관념으로 젊은이에게 갑질이나 하고 비난받는 늙은이는 되지 말아야 겠다.
2020년도 출산아 수는 27만 6천여 명으로 세계 최하위이며 대학 입학정원은 47만 9천여 명으로 거의 출산아 수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늙은이가 줄어지고 출산아가 늘어나야 한다. 요즘은 인포데믹스(Infordemics= Information+Epidemics)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유행병만 옮기는 형이하학적인 가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양원 신세를 겨우 면한 늙은이가 카카오톡으로 인포e데믹스나 즐기면 되겠는가? 젊은이를 창의적인 소수로 역사를 창조해 가는 젊은이로 만드는 노인이 되었으면 한다.

오승재 장로
<오정교회·한남대학교 ㅁ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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