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01) 소다 가이치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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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선생은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노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데라우찌 총독과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 교회) 장로이며 서방에도 일본 기독교 장로로 알려진 대법원장 와다나베를 찾아가 ‘죄 없는 조선 사람을 즉시 석방하라’고 항의하였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 알려졌다. 그래서 서울 중구 회현동에 일본인 감리교회(현 강남 반포동 남산교회)가 설립되어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소다는 서울에서 강연 잘하기로 장안에 소문이 났으며 그 인기는 참으로 높았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교회의 초청도 받았으며, 강연할 때 자신의 방탕했던 생활부터 대만에서 조선인의 도움으로 살아난 이야기도 하면서 그의 신앙은 더욱 성장해갔다.
1913년 소다는 러·일 전쟁 후 사회적 불안과 경제 불황으로 고아들이 많아졌다. 소다는 경성 고아원을 세웠다. 버려진 아기들을 업어 오면 어디다 팔아먹으려는 게 아니냐고 돌을 던지며 욕을 퍼부었다. 소다는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젖을 구걸하고 밤을 새우며 아기를 안고 달랬다. 1921년 뜻하지 않은 책임이 일본으로부터 그에게 부여되었다. 고아사업기관인 일본의 최고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 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가마쿠라 보육원은 1896년 일본인 사다케가 세운 것으로 1913년부터는 자기 고아원 출신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이를 한국에 파송하여 경성지부를 설치한 것인데 이것을 소다가 인계받게 되었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총독부가 대여한 1200평 대지에 가마쿠라 보육원(현 영락 보린원)을 세우고 이화학교와 숙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우에노가 1926년부터 사임하고 고아원의 전임보모로 일하면서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식민지 치하와 전쟁의 어려운 경제여건 중에서도 꾸준히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들은 해방이 되기까지 수천 명의 고아들을 길러냈다.
1919년 3.1운동으로 그가 존경하던 이상재 선생과 YMCA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소다는 대법원장을 찾아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1919년 3.1운동 때 이상재 선생도 투옥되었는데 소다는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며 석방을 호소하였다.
1919년 불어 닥친 세계적인 대공황속에서 조선의 거리는 기아에 허덕였다. 소다 내외는 거리에 버려진 아기들을 데려다가 키웠다. 젖이 없어 젖동냥을 하며 집집을 찾아 다녔다. 이들은 가마쿠라 보육원(현 영락 보린원)에서 조선인 고아들과 함께 살았다.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는 ‘하늘의 할머니’라고 불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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