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한국교회] 이란에 반서방적 반미감정의 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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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반이스라엘 강경 정책

이슬람 혁명의 긴장감과 ‘혁명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방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호메이니 사후 이 같은 흐름이 두드러졌다. 1993년 하셰미 라프산자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자유화 조치들이 시작됐고, 이는 청년층과 여성 유권자들의 엄청난 지지 속에 무하마드 하타미 개혁파 대통령이 1997년 집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기 연임을 하는 동안 하타미 대통령은 번번이 보수세력에 발목 잡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국제사회는 하타미 대통령의 ‘문명의 대화’ 주장에 큰 호응을 표했고 미국의 빌 클린턴 정권도 어정쩡하게나마 이란 개혁파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이슬람 혁명의 수호세력을 자처하는 보수파들의 저항은 강했다. 서구식 입헌민주주의 절차와 이슬람 신정이 결합돼 있는 이란의 정치체제상 대통령은 전면적인 권력행사가 불가능하게 돼 있다.

개혁파가 장악한 의회와 보수적인 사법부(이슬람 성직자들로 구성된 재판관들)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이슬람 민병대와 개혁파 학생들 간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타미 정부가 끝나고 200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반격 속에 초강경 이슬람주의자인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재출마한 라프산자니 전대통령에게 압승을 거뒀다. 보수파의 승리는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회귀라기보다는 ‘개혁 피로감’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민주화, 자유화 개혁 속에 하타미 정권 시절 ‘개혁파 기득권층’이 생겨나 석유 이권을 서방에 팔면서 이득을 챙겼다는 국민적인 반발이 생겨났다는 것. 실제 아흐마디네자드는 ‘석유 이익은 국민에게’ ‘서민들을 위한 정치’라는 슬로건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이란의 제6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전에는 테헤란 시장을 역임했다. 보수강경파로 알려진 인물로 2005년 8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전임인 모하마드 하타미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집권 이후, 줄곧 미국의 부시행정부에 대해 대립각을 세웠다.

일명 ‘악의 축’ 국가로 지목된 이후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래의 악감정 수준의 대립이었던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이란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군사적 대립까지 염두에 둔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반면, 러시아와는 유대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반이스라엘 강경 정책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기도 하다. 2005년 10월에는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국가지도자로서 부적합한 발언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고, 유대인 학살을 거짓된 신화라고 여러 차례 주장하였으며, 2006년 12월에는 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이란으로 초청하여 홀로코스트 글로벌비전 국제회의라는 반유대주의적 회의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소기천 박사

<장신대 성서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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