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거룩성의 회복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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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를 일컬을 때 ‘성도’, ‘거룩한 공교회’라고 한다. 이를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일컬을 수 있으나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촉구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거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 거룩은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연 온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교회의 평판이 떨어진 시대 속에서 우리가 ‘거룩’을 말한다면 세상이 뭐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성’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거룩성을 회복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톨스토이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라는 책을 그가 죽기 2년 전에 저술하였는데, 이를 톨스토이의 잠언집이라고도 한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내가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라고 하면서 ‘인생이 살아갈 날들을 위하여 무엇을 공부해야 할 것인가?’를 설파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공부’, 또는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감히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도덕성의 회복’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도덕성의 해이, 도덕의 붕괴는 단순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 아니라 모든 것의 붕괴를 가져오게 하는 것으로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가 된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창조의 세계를 이루시고 그 세계를 인간에게 위임하셨으며, 그 위임은 이성으로 다스리되 다스림의 기준으로 도덕을 주셨다”라고 한다. 일반인은 물론 크리스천이 도덕적이지 못하면 무신론자가 되고, 맘몬의 노예가 된다. 이 말은 비도덕적인 것은 언제나 ‘맘몬’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러면 거기에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기도, 회개, 봉사를 말하나 그보다 앞서 건전한 도덕성 회복, 도덕 재무장 운동이 필요하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제발 거짓말 좀 덜 하라!”는 것이다.

둘째, 법이 법 되게 해야 한다. 도덕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것을 잘되게 하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리스도인은 법이 필요 없다. 주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이 사랑의 법이면 충분한 것인데, 이 법이 지켜지지 않으니 법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법에다 ‘유권해석’이라는 것을 핑계하여 법을 자기에게, 어떤 집단에 유리하도록 해서 법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법이 말하는 대로 법이 법 되도록 해야지 자꾸만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를 생각하는 법꾸라지는 교계에서도 세상에서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나는 죄인이다”라는 의식으로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너는 죄인이다. 네가 잘못했다”라는 구조에 갇혀 있다. 기독교는 “내가 죄인이다”라는 인정 속에서 용서와 구원, 은혜와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거룩이 회복되어 의롭다 인정함을 받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의 회복은 일상적이고, 삶의 내용인 것이다. 어떤 의식이나 짧은 수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2022년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생각하는 ‘산상변화주일’을 맞고 사순절을 맞으면서 깊이 있게 자신을 돌아보아 거룩성을 회복하되, 도덕성의 회복, 법질서의 회복, 그리고 다시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신앙 속에서 가능해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맘으로 거룩성 회복의 희망을 보낸다.

정영택 목사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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