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향기] 서울숲교회 권위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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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사랑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해 목회하겠습니다”

권정생 선생·정창근 장로·이영화 목사 등 목회 인생에 귀한 스승들 감사

올해로 권위영 목사가 서울숲교회에 위임된 지 20년이 됐다. 지금은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핫플레이스이지만 예전엔 구두 공장이 밀집한 성수동 한복판에 위치한 서울숲교회. 20년 전 권 목사가 부임할 당시엔 갈등과 분쟁으로 담임목사 없이 1년 넘게 다른 교회 목사가 설교 지원을 하던 교회였다. 권 목사는 “주님 앞에 감당할 수 없다고 기도한 게 벌써 20년이 됐다”면서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평안하게 목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저는 이 교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저희 교회 달력에는 담임목사 이름이 안 들어가 있는데, 솔직히 교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제 이름을 빼고 제작한 것입니다. 제 나이 마흔에 와서 어느덧 환갑이 됐네요. 지금 저희 교회는 당회가 평안합니다. 장로님들 덕분이에요. 저희 교회 장로님들은 교회만 섬기시는 참 좋은 어른들이세요.”
오랜 갈등으로 임직식도 멈춰있던 서울숲교회에서 권 목사 부임 후 처음 가진 임직식은 온 교회의 잔치 같았다. 오랜만에 세워진 교회 일꾼들은 기쁨에 자발적으로 기존 정해진 액수보다 많은 헌금을 모았고, 그것이 종자돈이 되어 교회는 공간을 조금씩 늘려왔다. 지난해에는 교회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새 예배당을 헌당했다. ‘숲애온(숲愛ON) 센터’라 이름 짓고 앞으로 100년을 준비하자는 의미도 담았다.
권위영 목사는 경북 예천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태어났다. 고향교회는 금곡교회. 당시는 교단이 갈라지기 전이었고 지금은 합동교단 교회다. 1900년에 설립된 금곡교회는 선교사가 이 지역에 들어오기도 전에 세워졌다. 41대 총회장을 지낸 이대영 목사가 금곡교회 출신이다. 권 목사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처음으로 예수를 믿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교회엘 나가셨다.
“아버지는 종손이셔서 집안 어른들이 교회에 못나가게 하셨지요. 회초리 맞아가면서 예수님을 믿으셨어요.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 담임전도사로 사역을 하시기도 하셨어요. 집안에서 지원 전혀 없이 어렵게 신학원을 나오셨고 안동일직교회가 담임목사로 첫 목회지였어요. 제가 태어나기는 예천에서 났지만 자라기는 안동에서 쭉 살았어요. 안동일직교회에서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첫 어른을 만나는데 그분이 권정생 선생님이십니다.”

권정생 선생, 정창근 장로의 영향

故 권정생 선생은 아동문학가로 ‘강아지똥’, ‘몽실 언니’ 등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을 향한 애정이 그의 작품에 많이 담겨있다. 권 선생은 안동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봉사하며 참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어른이셨습니다. 제가 알기론 본명이 따로 있으시고, 바를 ‘정(正)’ 날 ‘생(生)’ 글자를 써서 거듭났다는 의미로 ‘정생’이라는 이름을 쓰셨어요. 일직교회가 있던 곳이 면소재지도 아니고 당시 완전 시골이었기 때문에 보기 힘들었던 소년 한국일보 같은 것들을 선생께서 보실 때 곁에서 보곤 했어요. 어린 시절 아버님께 야단맞고 엄동설한에 쫓겨나 벌을 받고 있을 때 선생님 방에 몰래 숨어들어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선생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또 그분의 검소하고 믿음과 일치된 삶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지금 도시목회를 하면서 약하고 소외된 것들을 향한 마음을 품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권 목사는 초등학교만 세 곳을 다녔다. 일직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아버지께서 목회지를 옮기시면서 봉화 춘양국민학교로 전학 갔고, 나중엔 안동 길안국민학교에서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전교어린이회장, 중학교에선 전교학생회장 등으로 리더십을 보였고, 안동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3년간 자취생활을 하며 교회 일에 매달렸다. 권 목사는 이때가 신앙생활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고등학교가 집에서 멀어 자취하며 등교했습니다. 그때엔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교회 일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사택을 지을 때는 직접 건축 일을 도왔고, ‘불기둥’이라는 이름의 문학잡지도 만들었고, 중고등부 회장도 맡으면서, 어쩌면 학교 공부보다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아요. 지금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때 신앙의 열정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위영 목사의 부친 권덕해 목사 역시 권 목사 목회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권 목사는 “목사가 아버님 같은 분을 의미한다면, 저는 전도사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님은 평생 희생하며 사셨던 것 같아요. 목사로서 또 아버지로서 제게는 무척 귀한 분이세요. 아버님은 워낙 신앙이나 생활에 철저한 분이셨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 야단맞은 기억이 많아요. 아버님은 전도사로 25년을 사역하셨고 49살 늦은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안동성안교회를 개척하셔서 은퇴 전까지 목회하셨고 경안노회장을 지내시고 공로목사로 은퇴하셨어요.”
권 목사가 잊지 못하는 또 한 사람은 안동교회 정창근 원로장로다. 권 목사는 정 장로의 장학금으로 신대원 과정을 마쳤다.
“안동 성자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평생 섬기신 정창근 장로님께선 새벽기도를 두 번 나가세요. 새벽 4시에는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성자교회에서, 5시에는 시무하시는 안동교회에서. 그만큼 신실하시고 훌륭하신 분이세요. 가난한 목사 아들인 제가 신대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정 장로님 덕분이었습니다. 정 장로님께서는 등록금뿐 아니라 기숙사비, 교재값 다 지원해주셨어요. 장로님은 당시 저처럼 돈이 없어 학업이 어려운 신학생들을 여럿 도와주셨어요. 그분께 큰 빚을 졌지요.”
권 목사의 부친 권덕해 목사는 아들이 진 빚을 갚으려 은퇴 후 정창근 장로가 세운 안동 시온복지재단에서 원목으로 일하고 있다.
권위영 목사는 4남매 중 첫째로, 바로 밑 동생은 수동교회 권사, 둘째 동생은 발안감리교회 권사, 막내 동생은 부친이 시무하는 안동 시온복지재단 안에 있는 안동희망교회에서 안수집사이며 지휘자로 봉사한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다.
권 목사의 장인 故 박동억 장로는 평안남도 강서 고창교회 출신으로, 월남 후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며 교사 근속 40년 봉사상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믿음의 선배다.
“저희 장인어른께서 이북에 계실 때 어머니께서 목회하라고 하셨는데 사업하다가 월남하셨거든요. 그 죄로 장인어른의 딸 셋이 다 사모가 됐다고 저희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첫째 동서는 캐나다서부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하고 있고, 둘째 동서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 중입니다.”

이영화, 강동수 목사에게 목회 배워

권위영 목사 고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은 전도사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갑작스럽게 사임하게 됐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방 한 칸 얻어 교회를 나오셨던 사건이 권 목사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 일로 권 목사는 목회의 꿈을 접고 신학교가 아닌 안동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곧바로 ROTC 학사장교로 군에 입대했고 군 생활이 끝나갈 무렵 목회의 꿈이 다시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때 안동길안 송사교회에서 故 김시원 목사(관악노회 영동교회 원로) 부흥회 참석했다가 회심했고, 평생 새벽기도 할 사람 일어서라는 부름에 서원하여 그때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랬던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가 아닌 일반대학교에 간 것은 어쩌면 요나처럼 도망을 갔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목회를 향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고 제대하고 아버님 계신 시골교회로 내려가 고등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신대원을 준비했어요. 신학교 졸업하니 만 스물여덟 살이 됐는데, 우리 때부터는 만 서른이 넘지 않으면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어요. 제가 목회를 피해 다른 길로 간다고 했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리 돌아간 게 아니더라고요. 1992년 4월 28일 서울서노회 충신교회에서 만 서른살에 목사 안수 받고 이제 만 30년이 지났네요.”
신학교 졸업 전 교육전도사로 처음 사역한 곳은 서울서노회 염리교회였다. 첫 사역지에서 만난 이영화 목사 역시 권 목사 목회 인생에 손꼽히는 중요한 사람이다.
“이영화 목사님은 첫 목회지에서 저를 목사로 키워주신 분입니다. 당시 결혼 전에는 전임전도사로 일할 수 없었는데 염리교회에서는 아직 총각인 제가 전임전도사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어요. 염리교회에서 신학교 졸업도 하고 결혼도 했어요. 또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죠. 이후 동신교회 강동수 목사님 밑에서 사역하며 선임부목사까지 맡았고, 마흔 살에 서울숲교회에 와서 올해로 만 20년째가 됐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력하는 목회

권위영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력하는 목회’가 그의 목회 철학이다. 서울숲교회는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 ‘통큰 통독’이라는 성경읽기 프로그램을 9기까지 진행했다. 외부 강사를 초청해 성경 전체를 보는 훈련이었는데 한 번에 60~70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또 전 교인이 함께 하는 큐티(QT, 성경묵상훈련)를 꾸준히 진행하는 등 이벤트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서 목회하려고 노력해 왔다. 40일 동안 권 목사가 이끌었던 ‘40일 말씀 훈련’도 그중 하나다.
정창근 장로님께 빚진 마음으로 당회원과 교회 어른들을 섬기며, 당회가 평안해야 교회가 평안하다는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다. 또 시골 출신으로서 농촌교회를 향한 마음도 각별해 지난 15년 동안 서울노회 양평동남시찰회 산하 농촌교회들을 매달 찾아가 예배드린다.
“서울노회 양평동남시찰회 해당 지역인 양평과 홍천 일부 지역에 있는 교회에 한 달에 한 교회씩 서울숲교회 교인들이 30~40명 정도 찾아가 함께 예배드립니다. 농촌교회를 찾아 그 교회 목사님 설교로 예배드리고 농촌지역을 잠시나마 경험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또 평신도 리더 양육을 중요하게 생각해 권 목사는 부임 후 2년에 한 번씩 임직식을 거행해 일꾼을 세우고 있다. 이웃사랑 실천을 위해 일 년에 두 차례 지역 내 50가정에 쌀과 직접 만든 밑반찬을 나누고, 재해나 이변이 발생하면 총회 사회봉사부를 통해 구호 협력한다.
지난 3년 코로나19로 인해 서울숲교회도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해왔다. 권 목사는 “코로나 이전에 비하면 현장 출석 교인수가 아직 60퍼센트밖에 안 된다. 앞으로 예배도 대면, 비대면 두 트랙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되도록 교인들이 현장인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기도를 많이 하고 잘 준비해서 감당해야 할 시기다”라고 말했다.
“최근 정창근 장로님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분의 사랑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때는 가난해서 그분 장학금으로 공부한 것이 부끄러운 적도 있었는데,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고치시면서 버신 돈으로 장학금을 받아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기에 그 사랑 잊지 않고 늘 마음 속에 간직하려고 합니다.”
권위영 목사는 서울서노회에서 7년, 서울동노회에서 7년반, 서울노회에서 20년, 강북 지역에서만 목회했으며, 총회에서 규칙부, 사회봉사부, 군경교정선교부,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기독교청년위원회, 기독교학원위원회, 연금재단 등에서 두루 일했고, 현재도 훈련원 후원이사회 서기, 마을목회위원회 서기, 한국교회봉사단 국내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한국교도소선교회 후원이사회 이사장과 서울노회장을 역임, 현재 서울노회 해외선교부 부장으로 봉사한다. 그밖에 동부선교회 회장, 서울시연합당회 대표회장, 범양선교회 대표회장 등으로 교단 밖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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