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라쇼몽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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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80의 은퇴장로 한 사람이 만원 전철안에서 자리를 찾아 몸을 옮기다가 우연히 젊은 여성의 뒤에 서있게 되었는데 그의 움직임을 바라본 다른 여인이 성추행을 의심하여, “여성에게서 떨어지세요”라고 소리쳤다. “당신이 잘못 봤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고 그는 주장해 보지만 결백을 입증할 길이 없다. 급기야 승무원을 불러 가상 피해자에게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물으라 하여 아무 일 없다는 대답을 듣고도 여인은 계속 그가 부끄러운 짓을 한 것으로 몰아세운다. 목적지에 당도하여 하차하였지만 못내 수치감을 씻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일본영화 『라쇼몽』의 스토리를 연상케 한다. 전후 일본 영화예술에 세계의 관심을 모은 아키라 쿠로사와 감독의 라쇼몽은 이야기와 배역이 간단하다. 오래된 필름을 유튜브로 봐서 기억이 희미하나 영화는 불승과 나무꾼과 마을사람 셋이 큰 대문아래서 비를 피하며 얼마 전 숲에서 일어난 살인, 강간 사건을 이야기한다. 사무라이 한사람이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그 무사의 처를 겁탈한 강도는 나중에 붙잡히고 여인은 도망쳤다가 재판정에 나와 자신이 겪은 바를 증언한다. 

강도는 주장하기를, 사무라이를 묶어 놓고 그의 처를 욕보이는데 여인이 남편을 풀어주고 두 남자가 결투하여 이긴 쪽이 자기를 차지하라고 하여 그대로 한 결과 무사를 죽이게 됐다 하고, 여인은 강도가 자기를 겁탈하고 가버린 후 자기는 남편을 풀어주고 그에게 단검을 주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으나 남편은 자기를 더럽혀진 여자로 취급하기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남편이 칼을 가슴에 꽂은 채 죽어 있더라 했고, 죽은 사무라이의 혼이 법정에 나타나 사실은 욕을 당한 자기 아내가 강도에게 정이 생겨 자기를 데리고 가려면 남편을 먼저 죽이라고 했고 강도는 자기에게 이런 여자를 버릴지 죽일지를 택하라고 하여 그는 강도를 용서하고 칼로 자기의 가슴을 찌른 것이라고 말했다.

숲 속에 숨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은 셋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자신만이 진실을 알지만 사건에 엮이기 싫다며 증언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승려와 마을사람에게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라쇼몽 영화는 진실의 추구란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중복적 전개 기법을 동원해 예술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로가 전철에서 당한 사건에도 소리지른 여인과 가상 피해자 이렇게 세 사람 외에 다른 승객들이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그들은 목격을 했든지 안 했든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 일은 내가 직접 겪은 것인데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데 교회 장로라는 신분이나 나이가 80이라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고 그 점이 더욱 무거운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나를 정죄한 여인 쪽에서는 한 남자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젊은 여성 뒤에 서있으므로 성추행의 고의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런 반사회적 행동을 외면할 수 없어서 소리를 친 것이니 과연 그녀를 비난할 수 있는가? 진정한 기독교적 인격이면 이러한 마음으로 고발자를 용서하고 나를 믿어 주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시니 내게 섭섭함이 없다고 외쳐야 할 터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여기에 고백한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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