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임청각을 떠나 영양으로 간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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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유림의 고장이다. 그럼에도 안동의 3.1운동은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안동의 첫 3.1만세 시위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의 이름은 이상동(李相東)이다. 이상동은 당시 조사(助事)인 동시에 피택받은 장로였다. 1919년 3월 13일 오후 5시 30분 경 그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태극기 모양의 종이 연을 몸에 두르고 5일장이 서는 안동의 중앙도로를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압송당하는 자동차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그는 상제(上帝)의 뜻과 가호에 의해 한국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독립될 것이며,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지만 출옥은 시간문제라고 소리쳤다. 상제는 천국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상동의 확고한 믿음을 볼 수 있게 한다. 이상동은 1년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이상동의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의 행동은 보신(保身)을 위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1865년 안동에서 출생한 이상동은 47세가 되던 1911년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과정에서 의병활동을 했으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함으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던 이상동은 함께 수감된 청년 이원영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했다. 안동의 인노절 기념성경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은 이원영은 1930년대 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며 목사면직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후 이원영 목사는 1954년 안동교회에서 열린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이상동 장로님을 통해 한국교회의 롤 모델이 될 만한 위대한 인물이 탄생된 것이다. 환경을 탓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지 않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상동 장로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이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생가(生家)인 99칸 임청각을 처분한 후 5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의 길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 된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은 이상동의 친형(親兄)이다. 형제는 참으로 용감했다. 1911년 형 이상룡은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처분하고 안동을 떠나 만주로 갔으며, 1911년 동생 이상동은 예수 믿고 변화되어 안동을 떠나 오지(奧地) 영덕으로 갔다. 그는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교회의 중책을 맡았다. 영양군에 소재한 포산교회에서 1918년에 장로로 피선되었지만 3.1만세 시위로 인한 복역으로 장로장립이 늦어져 1921년에 장립했다. 장로장립 보다 애국을 먼저 생각한 이상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 후 안동으로 이거한 이상동 장로님은 1932년 안동교회가 신세교회(현 안동동부교회)를 분립할 때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개척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게 했다. 더욱이 그의 차남 이운형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목사안수를 받아 60여 교회를 개척했다. 유불리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예수 믿은 후 매사에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상동 장로님의 헌신이 더욱 생각나는 아침이다.

김승학 목사<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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