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의 가을은 몇 번이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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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 때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계절의 가을보다 슬픈 것이 인생의 가을이다. 올가을은 유난히 슬픈 계절이 되었다. 며칠씩의 간격을 두고 우리가 존경하던 교계의 선배님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하늘로 가셨다. 이흥순, 김건철, 정승준 장로님이시다. 인생의 완연한 가을을 이들을 통해서 본다. 얼마 전에는 차를 타고 가다가 바라본 강가의 가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게 남은 가을은 얼마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았다. 많아야 고작 10~15번 정도 되지 않을까? 열 번에서 열다섯 번의 가을은 너무나도 짧다. 단풍잎 하나, 노랗게 바랜 풀잎 하나가 모두 아쉽고 아득하다. 한 계절의 복판에서는 그 풍경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다음 계절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새로운 빛과 냄새와 온도를 품고 들이닥칠 것이다. 

이러한 새로움은 지난 가을에도 겪은 것이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가을 날씨에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인생의 계절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움이 탄생하는가. 계절의 이질적인 양상을 감각할 수 있는 몸이 내게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수많은 잎이 피었다 지지만 그중 같은 잎은 하나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죽어가지만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토록 무한한 세계의 다채로움이 때로는 잘 믿기지가 않는다. 릴케는 ‘가을’이라는 시에서 잎이 지고 지구가 떨어지고, 시를 적고 있는 손과 우리 모두가 아득한 곳으로 추락한다고 썼다. 릴케의 시에 종종 등장하는 절대자적 존재는 자주 ‘신(하나님)’으로 해석되고는 한다. 어둠 속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모든 것을 받아주는 존재라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시간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열 번에서 열다섯 번의 가을이 끝나고 내가 없어진다는 것은 죽어 없어진 나의 몸이 가을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떨어진 잎이 땅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나무를 이루게 되는 일과 같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존 맥아더’ 목사는 노인들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단지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 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말년에 꿈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나는 안 돼’, ‘나는 이제 쓸모없는 늙은이야’ 따위의 푸념은 자신을 스스로 매장하는 짓이다. 

일본의 주부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누렛타오치바(濡れた落ち葉)’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젖은 낙엽’이라는 뜻이다. 마른 낙엽은 산들바람에도 잘 날아가지만 젖은 낙엽은 한번 눌어붙으면 빗자루로 쓸어도 땅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는 의미란다. ‘누렛타오치바’라는 말은 집안에서만 있는 정년퇴직 후의 늙은 남편을 부인이 밖으로 쓸어내고 싶어도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부담스런 존재라는 뜻이지만, 당사자인 노인들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표현이다. 노령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젖은 낙엽’ 신세의 노인들은 앞으로도 대폭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노인들이여!, 늙었다고 절대 기죽지 말고 체념하지도 말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꿈까지 잃게 되면 ‘젖은 낙엽’ 신세로 전락해 외롭고 긴 인생 여정의 막다른 길로 내몰리게 된다. 인생의 빛깔은 아침보다 황혼이 더욱 찬란한 법이다. 

필자와 가깝게 지내던 영동농장 창립자 김용복 회장이 1,11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고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문상을 다녀온 날 밤잠이 오지 않아 TV에서 방영하는 ‘뜨거운 싱어즈’를 밤새 시청했다. 배우 김영옥씨가 ‘천 개의 바람이 되어’(임형주씨 노래)를 부르는데 함께 한 멤버들, 음악감독 등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가사는 이랬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에는 종달새가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줄게요. 밤에는 어둠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저 넒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죽음의 찬가인데 왜 이렇게 슬플까.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 곧 잊혀질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사랑하며 살자. 베풀며 살자.

이창연 장로

<소망교회, 전 동아일보기자, 전 CBS재단이사, 전 총회 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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