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만추(晩秋)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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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더  곱더이다

가을은 짧고 추억은 길다고 했던가! 쑥부쟁이 연보라색으로 피어나 햇살이 눈부시고, 구절초의 하얀 입술이 애처롭다. 하지만 가을예찬은 가득함이다. 그래서 신록을 지나 소리 없이 오는 초가을 보다 깊은 느낌을 주는 만추가 풍요로운 것이다.

처서(處暑)만 지나고 나면 조석으로 부는 바람이 가을을 살갑게 느끼게 한다. 그토록 숨막히는 더위였는데 그것이 이렇게 싹 가시다니 새삼 자연의 섭리가 놀랍다. 이제 절기 상강과 입동을 지나고 나면 스산한 바람이 일고 가을은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산마다 단풍은 절정을 이루리라.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 하루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리라. 우리 인생도 가는 세월속에 성숙과 완숙으로 만추의 곱게 물든 단풍잎 같이 아름다우리라. 비록 절정에 머무는 시간이 짧더라도 낙엽은 기꺼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봄을 잉태하리라.

우리내 고향 마을의 가을달밤,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소리 들리고 간간히 소슬한 바람 소리에 섞여서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려오면 가슴이 아련해지고 어릴적 고향 정취에 훔뻑 젖는다. 여름철의 매미 소리와 가을철의 귀뚜라미 울음 소리는 단순한 벌레 소리가 아닌,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와 어울린 대자연의 멋진 협주곡 (協奏曲)이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흑우(黑牛)와 황우(黃牛) 어느 쪽이 일을 잘 하느냐는 길손의 물음에 밭가장 자리까지 쫓아 나와 귓속말로 흑우가 더 잘한다고 답한 어느 전기(傳記)속, 농부의 그런 소박하고 따뜻한 사랑과 정이 마냥 그립고 이런 세상 상상만 해도 기분이 그냥 좋아진다.

작열한 태양 아래 여름의 기상을 닮아 기운차고 시원스럽던 매미의 애절한 울음소리도 좋았지만 그래도 가을의 정조(情調)를 머금고 처량하고 애뜻하게 마음을 휘젓고 파고들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한결 더 좋았다.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귀뚜라미는 사람들과 가까이 삶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있어 왔다. 서구인들은 귀뚜라미를 일컬어 “노변(路邊)에서 평화를 연주하는 삶의 벗”이라고 했고 행운의 상징으로 알아 귀하게 다루었다.

섬돌 밑 귀뚜라미들은 무슨 깊은 사연이 있기에 어디로 떠나 갔을까. 깊어 가는 가을밤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향수(鄕愁)를 일깨우는 저릿한 음률로 애간장 녹이는 소리에 길고긴 가을 밤을 얼마나 많은 상념(想念)에 젖어 들게 했던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것들이 어찌된 사연인지 하 그리도 궁금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다.

정원과 농작물이 병충해로 사라지니 농약을 뿌릴 수 밖에 없었고, 모기때가 법석이니 자주 살충제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굴뚝마다 매캐한 연기를 잇따라 내뿜어 내고, 대기 오염이 갈수록 심해져서 세상이 온통 매연으로 찌들고 있으니, 연약한 귀뚜라미들이 그 속에서 어찌 견디어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곤충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람인들 숨을 쉬며 끝내 아무런 이상 없이 살아남아 100세시대를 누릴 수 있을까? 무심코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 땅에서 길이길이 억겁의 세월을 살아갈 우리들 의 후손들이 있기에 더 마음이 시리게 가슴 저려 온다.

문득 이 만추의 계절에 먼 사색의 오솔길을 김재호 작사 이수인 작곡 ‘고향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무작정 혼자 걷고 싶은 이 참을 수 없는 설램은 어인 일일까?

국화꽃 져버린/겨울 뜨락에//창 열면 하얗게/무서리 내리고//나래푸른 기러기는/북녘을 날아간다//아 ㅡ아 이제는 한적한/빈들에서 보라//

고향길 눈속에 선/꽃등불이 타겠네//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가면/별 은 멀어도//산골짝 깊은 골/초가 마을에//봄이 오면 가지마다/꽃잔치 흥겨우리//아~~ 이제는 손 모아/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함박눈이 쌓이네//고향집 싸리울엔/함박눈이 쌓이네

밤이 깊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사라진 이 깊은 적막의 밤, 곱게 물들이던 상념도 이제는 너덜너덜 빛이 바래고, 울적한 마음만 낙엽 쌓이듯 하니 아스라한 회억(回憶) 속에 이 밤도 나는 홀로 깨어 이제는 소식도 없이 떠나가 버린 귀뚜라미의 그 훈기만 그리워 본다.

해마다 오는 가을이지만 해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을 안겨다 주면서 필자의 여든 다섯번째 맞는 이번가을도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다. 휘영청 달 밝은 올 늦가을에는 불청객 코로나도 영원히 지구촌을 떠나고 언제쯤인가 문득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 귀뚜라미들이 금의환향 어정어정 기어 슬금슬금 다시 돌아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려 본다.

*표천(瓢泉) : 조롱박으로 퍼서 먹는 옹달샘

* 표천 오성건 장로

<송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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