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선천 복음화와 민족 교육의 주역 양전백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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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선천… 한국교회 발전‧성장 중심의 자리 

친구 도움으로 전도 시작, 선천에 기독교 전파

한국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눈부신 발전과 성장의 중심에는 평북 선천이 있었고, 또 거기에는 양전백이 있었다. 평양에서 입교한 후 각각 1896년 1897년 귀향한 노효준과 나병규가 고향 친구인 조규환의 도움으로 전도를 시작해 선천에 기독교가 전파됐다. 위대모 선교사가 선천 선교지부를 개설했고 선교 구역은 중앙 구역, 동 구역, 용천 구역, 서 구역, 북 구역, 극북 구역으로 구분됐다. 중앙 구역은 선천교회가 담당하는 구역으로 선천군과 구성군 2개 군이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5개의 신앙 공동체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유명한 섬인 신미도 신자들의 모임이었다. 이곳은 선천에서 불과 7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때까지 한 번도 선교사가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양전백이 이곳의 조사였다.

동 구역은 선천 동쪽 지역으로 그 경계까지 이르렀는데 조지 렉이 맡았으나 그는 한 번도 그곳에 가 보지 못했다. 그때 분리된 구역은 조사 강제근이 맡게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7개의 신앙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 중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용천 구역이라 불렀던 구역은 선천 서쪽에 있는 용천군과 철산군 2개의 군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첫 번째 담당 조사가 임명된 1901년 2월에 나누어졌는데 조사 장기정이 담당했다. 이 구역 신자들은 의주나 선천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주로 참석했는데 철산에서도 사경회 하기를 원했다. 이 구역에는 전체 145명의 세례교인, 269명의 학습교인을 포함해 모두 620명의 신자가 있었다. 

1901년 의주군은 조사 한 사람이 담당하는 서 구역으로 편성됐다. 그러나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곳이어서 12월에 두 구역으로 나눴다. 한 구역은 의주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에 있는 6개 신앙공동체와 읍내교회를 포함했고, 다른 한 구역은 의주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8개 신앙 공동체를 포함했다. 압록강 섬에 있는 작은 신앙 공동체를 제외하고 의주 서 구역의 6개 공동체는 모두 100여 명의 신자가 있는 사하치 중국 무역소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큰 공동체로, 모두 인구 밀도가 높은 압록강과 지류 계곡의 풍부한 농경지로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 구역의 조사는 김창건이었다. 

의주 동 구역은 남서쪽 다소 약한 세 곳을 제외하고는 서 구역보다 신자들이 많고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강했다. 이 구역은 대부분 산악지대였는데, 북쪽은 100리가 넘는 압록강에 연해 있었고 상대적으로 사람들은 가난했다. 남서쪽 피연은 250여 명의 신자가 있는 평안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체였는데 바로 전 가을에 분립했다. 선한 일을 하는 공동체였으며 조사는 김관근이었다. 의주 사람들은 전국에서 가장 진취적이었다. 그들은 지식 수준이 높고,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주의력 있게 탐구하는 사람들로 한 명의 선교사가 전적으로 그들을 위해 헌신했다. 거기에는 286명의 세례교인과 624명의 학습교인을 포함해 모두 1천156명의 신자가 있었다. 

북 구역은 의주 북쪽 압록강을 따라 삭주군, 자성군, 벽동군 세 군으로 구성됐다. 거기에는 6개의 공동체가 있었으나,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곳은 8-9곳이었다. 공동체는 규모가 작았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은 해안 사람들보다 다소 부족했다. 삭주골의 공동체는 평안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였는데 다른 곳처럼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조사는 한덕용이었다. 극북 구역은 강계 구역이라고 할 정도로 강계를 중심으로 이뤄진 구역인데 위원군과 초산군, 만주의 공동체가 있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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