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기적은 믿음을 강화하는가?

Google+ LinkedIn Katalk +

현대 의학의 힘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에 고통받고 있으면 누구나 기적을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나 병상에서 털고 일어나기를 원한다. 기도의 신비한 능력 보기를 원한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 사업에 기적이 일어나 성공하여 부자가 되기를 열망한다. 우리 집의 아이가 머리가 기적같이 총명한 아이가 되어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 가고, 입신 양명 성공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남북 통일의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체험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셨다. 매일 매일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다.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신뢰하지 못했다. 불경스러웠다. 불평이 많았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이 전해주는 역사를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참으로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어리석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복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일은 반역이었다. 불구하고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자기 눈동자같이 지켜 주셨다. 하지만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실 때 그들은 애굽의 생선과 오이와 참외 부추와 마늘을 그리워했다.(민 11:5) 결국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다. 기적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믿음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뉴턴(Newton)이 거울에 비친 태양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밝은 태양 광선이 뉴턴의 망막을 자극해서 망막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3일 동안이나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더 쳐다보았다면 실명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눈은 직사광선을 쳐다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기적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영혼은 그만큼 타락되어 순수하지 못하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면,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갈멜산의 엘리야에게 기적이 임했다. 그러나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40일 길, 호렙산으로 도망했다. 미가야 선지자도 아합왕 앞에서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상대로 대항했지만 엘리야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뺨을 맞고 옥에 갇혔다. 이사야, 호세아,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등 대부분의 선지자에게는 기적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신 말씀의 능력을 주셨다. 이사야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연약한 사람’에 비유하며 선과 정의가 무너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박국은 ‘정의가 시행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듣지 아니하시며 죄악을 보게 하신다’고 했다. 에스겔 시대에는 바벨론 군사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침입,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고 눈이 뽑혔으며 왕자들은 살해를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 

1970~80년대 어려운 시절에 교회 개척을 시작하여 온갖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세계 교회사에 빛나는 한국 교회 성장의 기적을 이루었다. 아쉽고 안타깝게도 그 지도자 중에는 말년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대형 교회뿐이 아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님 중에는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인가 싶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품은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기사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있는가!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기적이 꼭 믿음을 강화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런 죄인들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