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공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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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잔뜩 흐린 게 아무래도 비가 올 것만 같아 보였다. 남쪽 부산항이 이렇게 흐리면 오히려 그 반대로 서울 쪽은 맑게 개이는 경우가 있으니 미리부터 걱정할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다섯 번째 객차에 올랐다.

표에 찍혀 있는 대로 36번 좌석으로 찾아갔다.

“좌석표가 36번 맞습니까?” 승호는 분명히 36으로 되어 있는데 웬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얼른 표를 꺼내 보더니 두말 않고 앞자리로 옮겼다.

“이거 미안합니다. 그쪽이라면 그냥 앉으셔도 되는 걸….”

“아니에요. 제자리에 앉아야지요.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요.”

승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경우가 무척이나 밝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호는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는 게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들어 부산에서 구입한 최신판 <지진학>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서울 거리에서는 보기가 어려웠던 전문서적이다.

“선생님이세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여인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승호는 움찔하며 얼굴을 들었다.

“어떻게 그런 줄 아시고?”

여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저의 짐작이 맞았나 보네요.”

“어떻게 그것을?”

“책을 보시는 걸 보고 느낌으로요.”

승호는 펼쳤던 책을 덮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알아 맞춰 볼까요?”

승호는 옷차림이나 용모로 보아서는 대학생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학생치고는 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어 보였다.

“예술분야의 대학원생?”

여인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내가 하던 말이 귓전에 들리듯 머리속에 떠올랐다.

“여자란 누구나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래요. 더군다나 그 상대가 남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러니까 되도록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여보! 그게 무슨 말이 그래? 필요 이상이라니?”

“당신은 안 그렇다 해도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니까요. 나부터라도 친절하게 남자들이 말을 해주면 싫지가 않은걸요?”

승호는 빙 돌려서 훈계조로 하는 아내의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어떻든 순수한 마음에서 친절을 베푼다는 건 좋은 일이요!”

승호는 아내에게 뼈 있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었다.

“선생님! 이거 드시지요. 맛이 괜찮아요.”

승호는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어느새 꺼냈는지 여인의 손에 사과주스 캔이 들려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승호는 캔을 받아 들면서 도대체 이 여인의 직업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이 순간 필요 이상의 말은 좋지가 않다는 아내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의 직업은 디자이너에요.”

마치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나 한 듯이 묻지 않는 말에 스스로 자기 직업을 밝혔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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