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옛일로 현재 읽기

Google+ LinkedIn Katalk +

①寒食의 유래: 사월 초에 식목일이 있다. 나무를 심고 가꾸고 돌보는 날이다. 옛날에는 산에 나무가 없어서 사방공사에 힘을 쏟았다. 온종일 나무를 심고 나면 밀가루 한 포대를 삯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그와 같은 때 청명이 들어 있다. 2025년에는 4월 4일이 청명, 4월 5일이 식목일이자 한식(寒食)이다. 금년 식목일(植木日/Arbor day)에는 정원이나 교회 뜰에 혹은 가로수와 조상들의 묘지(선산)에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보자. 옛날 부산대학교 총장을 지낸 문홍주 박사는 제자들의 결혼 주례를 맡으며 신혼부부에게 부산대학교 교정 어느 곳에 좋은 나무를 결혼 기념 식수하고 매 5년마다 찾아와 본인들의 성장과 그 나무의 성장을 비교해보라고 가르쳐주었다 한다. 아주 좋은 주례 선생님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도 한남대 총장으로 재직할 때 신임 교수들에게 한남대 교정 어느 곳에 교수로 취직된 기념 식수를 해놓고 그 옆에서 사진 한 컷을 찍어놓고 먼 훗날 정년 퇴임할 때 또다시 그 나무 옆에 서서 사진 한 컷을 다시 찍은 후 교수 취임 때와 교수 퇴임 때를 비교해 나무는 얼마나 컸는지 본인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비교해보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이제 식목일과 한식을 맞아 한식의 유래를 찾아본다. 옛날, 중국 진(晉)나라의 태자 중이(重耳)가 여희(驪姬)의 난을 만나 초나라로 망명할 때 호언, 조쇠, 전힐, 위주 및 개자추(介子推) 등 다섯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진헌공이 죽고 잠깐 재탁자가 임금이 되었으나 신하들이 협조하지 않아 이극(李克)이 그를 죽이니 태자 중이(重耳)가 그 말을 듣고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개자추가 자기의 넓적다리를 잘라 먹였다. 그렇게 돌아온 후 중이(重耳)가 임금이 되니 그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그런데 문공은 자기를 따라오며 도와준 사람들 중 네 명에게만 상을 내리고 개자추에게는 아무 상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가 궁궐의 기둥에다가 글을 지어넣었다. “용(龍)이 교교(矯矯)하거늘 잠깐 그 살 곳을 잃었다. 다섯 마리 뱀이 좇아서 천하를 주유할 때 용이 굶주리거늘 한 뱀이 다리를 잘라 먹였다. 그 용이 연못에 돌아와 편안하게 되니 네 마리 뱀은 구멍에 들어가 다 제 살 곳을 차지했는데 한 마리만 구멍이 없어서 들판에 나가 울고 있다.” 문공(文公)은 이를 보고 그 기둥의 먹물을 깎아내라고 했으나 먹물이 점점 더 기둥 속으로 스며들어 깎아낼수록 글자의 획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제서야 문공이 깨닫고 뉘우치며 개자추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복부산(伏釜山) 속으로 떠나간 뒤였다. 산마루에서 그를 부르면 산 아래에서 응하고 산 아래에서 부르면 산마루에서 응하니 문공이 사람들에게 일러 산 골짜기마다 나무 아래에다 불을 지르게 했다. 개자추가 불을 피해 산 밖으로 나오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개자추는 끝내 나무를 안고 불타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문공이 크게 후회하면서 그날은 ‘한식(寒食)의 날’로 삼아 전국에 3일 동안 불을 피우지 않도록 했다. 오늘날 한식날엔 불을 지피지 않고 찬밥을 먹게 된 연유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이 풍습이 지켜지지 않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반대 이야기라 하겠다. 도움을 주는 것도 어렵지만 도움을 잘 받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도움(은혜)을 받고 고맙게 여겨 어떤 모양으로든지 고마움을 간직하고 도와준 사람이 후회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인간 도리의 마땅함인데 이게 그리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같은 교인이나 일가친척 및 사제지간의 인연이 있어 주례를 맡아 주는 때가 있었다. 한 예로 같은 교회 교인들 중 주례에 대한 사례를 하려고 돈 봉투를 보내오면 정중히 감사의 마음만으로 만족한다며 되돌려 주었다. 그 후 그들의 반응이 갈라졌다. 어떤 이는 고맙다는 말로 화답하고 그대로 지나갔다. 그게 정상이다. 나도 그 이상 기대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혹 어떤 이들은 다시 얼마 후에 들기름이나 과일 상자를 보내오며 거절(반품)할 수 없게 만들어 감사의 정을 표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요 또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렇게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