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피아여학교, 광주 3.1운동의 중심 역할 감당
광주 수피아 여자중·고등학교에서 발행한 교지 <잔디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주의 교육 사업은 스테이션 개설이 된 지 얼마 안 된 1907년에 조선인 직원들의 자녀와 교인들의 자녀를 모아 놓고 배유지 목사의 사랑방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1907년 교세가 확장되고 남녀 학생수가 증가함으로 여학생은 따로 변요한(J.F. Preston) 목사의 사랑채로 옮겨 가고 남학생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1908년 2월 1일 구한말 정부로부터 숭일이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얻었으며, 숭일이라는 이름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을 섬긴다는 뜻이다. 초대 교장에는 변요한 목사가 취임했다.”
한편 수피아여학교는 변요한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공부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1908년 봄에 정식으로 초대 교장에 그레이엄(Miss E. Graham. 한국명:엄언라, 이하 엄언라로 표기)이 취임했으며 이것이 수피아여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오원 선교사의 사랑채로 옮겼으며, 엄언라 교장의 일시적 귀국으로 윌슨 선교사의 부인인 로버트 윌슨 선교사가 임시로 교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비록 학교 시설은 미비했지만 1910년을 맞이하면서 학생들은 민족에 대한 자각심을 갖고 서서히 자주적인 사상이 움트고 있었다. 수피아여학교는 개교한 첫날부터 채플이 실시되어 채플 시간마다 고난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배웠고, 또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만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나안 복지를 향해 전진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수피아 학생들은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했다.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의 날 이후 9월, 매퀸(Miss A. Mc-Queen, 한국명: 구애라, 이하 구애라로 표기) 선교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조선 총독부는 새로운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교회에서 경영하는 사립학교를 정비했다.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쳤고, 성경을 배운 학생들은 비록 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것을 절감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민족의식의 진원지가 되었던 사립학교를 대폭 폐교시켰는데 서서히 미션학교에도 이러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결국 시설 미비란 이름하에 수피아여학교도 폐교의 대상이 되었지만 구애라 선교사는 1911년 미국으로 귀국해 자신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 남장로교 총회 산하 교회를 순회하면서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성도 여러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버린 한국 땅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렵니까? 일제는 우리 여학교까지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시설을 갖추고 여성 교육을 통해서 한국 여성을 구원해야 합니다.”
예상 밖으로 많은 여신도들이 이 일에 호응해 주었으며 더욱 놀라운 일은 스턴스(Mrs. M. L. Stearns. Jennie Speer) 여신도가 구애라 선교사에게 헌금을 하겠다고 한 일이었다.
“여기 친정의 어린 동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5천 달러를 내놓겠습니다.”
“아니, 이렇게 많은 자금을 헌금하시다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구애라 선교사는 뛸 듯 기뻤다. 그는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와 회색 벽돌로 3층(현재:수피아홀) 건물을 건축했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의 고장 광주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나자 공사현장에 몰려와 구경을 하기도 했다.
이 건물이 완성되자 구애라 선교사는 5천 달러를 기증한 스턴스의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광주여학교란 교명을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로 명명했다.
시설이 좋은 학교란 이름이 광주 및 전남 각 지방에 알려지자 학생들이 수피아여학교로 몰려왔다. 그후 1913년에는 보통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고, 1915년에는 고등과 제1회 졸업생으로 박애순, 표제금 등을 배출함으로 명실공히 학제를 구비한 여학교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3.1운동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광주의 3.1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수피아여학교는 교육의 요람지로 끝나지 않고 민족운동의 요람지로 발전해 갔다. 광주 지방 3.1운동 판결문을 보면, 박애순 교사가 교실에서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 주고 “세계평화회의에서 한국도 독립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외친 후에 “우리도 여성이지만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야 합니다”라고 가르쳤다.
순진한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막연히 교실에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광주 지방에서도 3.1독립운동의 거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전라남도사(1956년 간행)’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주의 3.1독립운동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크게 활동했다. 기미년 2월 말경에 서울에 있는 김필수 목사는 독립운동준비회의 밀명을 띠고 광주에 와서 최흥종 장로(후에 목사가 되었음)와 김철과 밀회해 3월 1일 국장을 계기로 대운동이 전개될 것을 말하고 광주 독립운동을 부탁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3월 1일에는 독립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이 일이 실행될 수 있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의 인솔로 학생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교문을 빠져나갈 때 숭일학교 학생들까지 합세해 광주천으로 향했다. 일반 시민과 교인들은 서문통으로 내려오고 있었으며,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다른 시민들은 북문통을 통해 1천여 명이 삽시간에 작은 장터로 몰려들면서 드디어 소리 높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대로 3월 1일 을 기해서 만세를 부르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서로 연락이 잘못되어 이날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시기를 놓쳤다 해 그냥 앉아만 있을 광주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기로 약속되었던 최흥종은 청량리에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해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관에게 체포되었고, 김철 혼자만 3월 5일 광주에 오게 되었다. 그날 밤에 광주 3.1운동의 거사를 위해서 숭일학교 학감이던 남궁혁 장로의 집에서 김철을 비롯해 김강,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김용규, 최정두, 최한영, 김태열 등 주로 교인과 숭일학교 교사, 일반 시민 대표가 모였고, 여기에 수피아여학교에서는 홍승애가 대표로 참석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