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시작된 복음, 변요한 선교사의 조선 선교
변요한 선교사는 플로리다에서 출생했으며, 1896년에 킹칼리지를 졸업했고 퍼먼대학을 거쳐서 1900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03년 4월 18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에 왔다. 또한 부인 애니(Annie S. W. Preston. 1879~1983) 선교사는 노스캐롤나이나 주에서 출생해 1894년 스타티시빌리대학을 졸업했다. 1903년 9월 2일 결혼 예식 후 곧 한국 선교에 임했으며, 이들 부부는 목포를 고향으로 알고 그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들의 좋은 벗이 되었다.
죽은 자의 무덤과 말하는 변요한 선교사
특별히 변요한 선교사는 노인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전도여행 때문에 자주 지방을 방문했는데 뜻하지 않게 즐비하게 있는 공동묘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이 나라에서 목격되는 가장 슬픈 모습 중의 하나는 언덕들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무덤들이었다. 그 대부분은 특별히 표지도 없으며, 잊혀진 무덤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지나간 삶을 말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 무덤들을 볼 때마다 내게는 환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문득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 이러한 말이 지나갔을 때 그들 모두가 지옥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 나는 몇 날을 지새우면서 결심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무덤이 생겨날 때는 ‘예수 안에 잠들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변요한, 1908년 6월호 선교보고서)
그후부터 변요한 선교사는 나이든 노인을 만날 때마다 겸손하게 인사를 나누고 예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전한 결과 어느 노인이 예수를 믿고 마지막 병상에서 병문안 오는 자신의 친구 노인들에게 전도를 했다.
“참으로 감사하네. 그런데 내 걱정 하지 말고 자네들 야수를 믿어야 해. 야수 안에서 잠든 그 이상 복이 없다네.”
이 노인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떠났지만 ‘야수’를 전해 받았던 그 친구 노인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내세를 준비했다니 변요한 선교사에게는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었다. 그의 사역은 목포 지방에만 국한되지 않고 멀리는 강진, 장흥까지 이어져 그의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광주선교부의 사업이 확장되자 1909년 변요한 선교사 부부는 광주로 이거해 갔으며, 그 대신 목포는 하위렴 선교사 부부와 맹현리 선교사 부부가 이어 담당했다.
순천선교부와 변요한 선교사
광주선교부에서는 뜻하지 않게 오원 선교사가 순교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동안 목포진료소 개설과 함께 목포 지역에 산재해 있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교회를 설립했으며, 선교부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배유지 선교사와 함께 광주선교부를 개척하고 즉시 전남 내륙 지방인 화순, 보성 지방을 다니면서 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던 중 급성 폐렴으로 광주에서 사망하고 말았다(오원 선교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필자의 저서 ‘메마른 땅에 단비가 되어’ 참고).
광주선교부의 사업이 확장되자 절대적인 인원이 요청되었다. 그래서 1차적으로 1909년에 변요한 선교사 부부가 부임했으며 이어서 노라복 선교사 부부, 남대리 선교사 부부, 스트레퍼 선교사가 충원되었다.
광주선교부에 도착한 변요한 선교사는 배유지 선교사의 안내로 순천까지 선교여행을 했는데 순천읍교회는 매주 5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수, 광양 지방을 방문한 후 순천 선교에 대한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발전하는 숭일학교의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들의 선교여행은 순천 선교의 출발이 되었다. 그리고 1904년 전위렴 선교사는 호남 지방 선교 약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순천에도 선교부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선교본부의 인적 및 재정적인 문제로 그 일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9년 배유지, 변요한 선교사의 강력한 요구로 전남 동남 지방 어느 적당한 곳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윌슨, 유서백, 변요한, 하위렴 선교사 등 이렇게 4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의 의견은 구구했다. 순천과 벌교를 놓고 상당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순천이 철도의 중심지가 된다는 여론이 일자 4인 위원회에서도 최종적으로 순천을 택하게 되었다. 위원들은 발빠른 행동을 개시했으며 변요한, 배유지, 윌슨 선교사 등이 개인적으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은 후 광주 북문안교회의 김윤수 집사를 순천에 보내어 순천교회 김억평과 의논해 토지를 구입하도록 했다.
김윤수 집사의 보고를 받은 변요한 선교사는 코잇(R. T. Coit 1878~1932, 한국명 : 고라복, 이하 고라복으로 표기) 선교사를 대동하고 순천선교부 부지를 확인하고 그 지역 여러 교회를 순반하면서 학습문답을 실시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밖에 몰랐던 변요한 선교사 부부는 191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했으며 그를 파송했던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는 변요한 선교사 부부가 쉴 수 있는 일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식년의 일정을 바꾸어 때마침 미국 남장로교 산하 모든 교회들이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이 고조됨을 확인하고 좋은 기회라도 얻은 듯 프랫(C. H. Pratt. 1881~1950, 한국명 : 안채륜, 이하 안채륜으로 표기) 목사와 함께 각 교회를 순방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한국은 복음의 계절을 만났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 백성들은 일제의 헌병정치에 숨통이 막혀 있습니다.”
변요한 선교사는 그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하면서 선교사 동원과 선교 후원비를 요청했다.
“지금 호남 지방 전주, 군산, 목포, 광주에는 선교부가 창설되었지만 새로 순천에 선교부를 개설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유능한 선교사가 요청됩니다. 특별히 미션학교에 일할 평신도 교사 선교사가 요청됩니다.”
변요한 선교사는 가는 곳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계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위렴 선교사의 처남인 레이번(E. R. Leyburn) 목사의 초청을 받고 두르함제일교회에서 한국 선교상황 보고를 갖게 되었다.
“전위렴 선교사는 군산에서 성공적으로 선교사역을 하다 1908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산교회와 구암교회, 군산 영명학교를 설립했으며, 그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는 군산 멜본딘여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