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믿음] 6.25 전쟁과 학도병 희생(장진호전투) 간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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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있었던 학도병의 편지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란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敵)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우리 민족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기만 합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앞에는 수 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기만 합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서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서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약간 안정됩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또 쓸게요.’

이는 국군 제3사단 소속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이다. 그는 1950년 8월 10일 전투에서 사망했다. 불과 15세의 나이로 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전해 산화한 서울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생은 이렇게 썼다. ‘홀로 계신 어머님의 손길을 스쳐 가고 싶다’고 왜 그랬을까? 어머니란 이름은 명사요, 감탄사이기 때문이다.

학도 의용군 71명이 총격전과 백병전으로 북한군 766유격대 수백 명을 막아낸 11시간의 전투. 이 11시간 덕분에 민간인과 주요 기관들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3사단 미군이 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학도병들의 나이는 15~18세였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서울 이모집에서 약한 몸으로 하루 종일 도보로 부모 가족을 찾아 고향에 내려갔던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요, 나를 보호 감싸주신 것으로 믿고 오늘의 내가 이렇게 살아서 6.25 간증을 한다는 것은 은혜임을 다시금 감사하다.

참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또한 6.25 한국전쟁의 다른 일면을 보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빼놓을 수가 없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 38선을 돌파해 10월 20일에는 평양까지 수복했다. 미 해병사단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고 바로 맥아더 장군의 작전이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원산에 상륙해서 북진으로의 선봉에 이르렀던 것이다.

북한군은 개마공원 근처 강계 지구로 도주했다. 이 충천한 미군과 한국군은 강계를 목표로 11월 24일 군무암리에 진입했다. 중공군의 대공세로 개마공원 장진호에서 포위당하고 미군 전쟁사에서 진주만 기습 이후 장진호 전투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최석산 장로

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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