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당시 고구려 지방의 사정은 행정사무가 간단하게 시행되었고 범죄에 대해서도 소위 그 자리에서 결정해 처리하는 주의로 임해, 죽여야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죽여서 끝내고, 또는 죽이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는 보상을 징구하거나 또는 노비로 강등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건의 결말을 내리며, 결국 구금을 필요로 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감옥 설비는 있지 아니했을 것이다.
부여에 존재했다고 하는 감옥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은 물론 알 수 없지만 다만 생긴 모양에 대해 원형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위지(魏誌)』에서 ‘부여에서는 성(城)을 만드는 것은 모두 원형으로 하고 감옥과 비슷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부여의 성이 원형으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마치 감옥의 모양과 비슷하다고 일컬어진 점으로부터 이를 반대 해석으로 고찰하면 감옥의 형태는 성과 유사하게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부여의 감옥 형태는 원형이었다고 하는 결론을 내려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여기에서 비교 대상으로 올려진 감옥은 부여의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감옥이 채택된 것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 감옥은 『주례(周禮)』에도 ‘대사구가 환토(圓土)로 파민(罷民)을 모아 교화한다. 무릇 사람을 해친 자는 환토에 가두고 직사(職事)를 시행하여 명형(明刑)으로 수치심을 가지게 한다. 그들 중 잘못을 고친 자는 중국으로 되돌리되 3년 동안 사람 축에 끼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 중 잘못을 고치지 못한 자는 환토에서 끌어내어 죽인다.’ 또 ‘노(奴)가 된 자로서 남자는 죄례(罪諫)에 들여서 환토(圓土)에 가두고 교화하며 수감 연수가 차면 놓아준다.’ 또 ‘환토는 옥성(獄城)이다. 감옥에는 반드시 담을 두르는 것이 규례이다’라고 실려있는 것과 같이 이미 주(周)나라 시대부터 원형이었고, 그것이 멀리 내려와 후세에까지도 본보기가 되는 표준이 되었던 것은 맞다. 현재 삼국사기 중에서 ‘670년(신라 문무왕 10년) 춘정월 당나라 고종(高宗)은 허흠(許歎)이 나라에 돌아가는 것을 허가하였으나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었던 양도(良圖)는 결국 둥근 옥 당나라 옥(獄)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보더라도 당나라 시대의 감옥이 둥근 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