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세 배움터에서 한결 스승의 인격과 학문을 잘 배웠다. 석·박사 공부하던 한양대 인문과학대학 현관에 모신 한결 김윤경 스승 얼굴상을 뵐 때마다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롭게 새겼다. 근래 세계 명문으로 우뚝선 한양대 인문과학대 정년을 앞둔 교수 방문길에 한결 스승 얼굴상을 현관 벽에서 먼저 뵙고 고개 숙였다.
한결 스승 얼굴상 글을 그대로 여기 소개 한다. 첫머리에 “문리과대학 학장 고 한결 김윤경 박사 문리과대학 학생일동 1969. 8. 20”으로 새겨두고 밑에 인물의 빛삶을 밝혔다. “한결 김윤경 선생은 1894년 6월 9일에 태어나 1969년 2월 3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학자로서의 선생은 <한국문자급연구>를 중심으로 불멸의 학문적 업적을 남기셨고 교육자로서의 선생은 40여 년의 교단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깨우침과 넓은 감화를 주셨으며 애국자로서의 선생은 왜정하에 두 번의 옥고를 겪으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선생은 학자로서 뛰어나시고 교육자로서 성실하며 애국자로서 철저해 그 고결한 인격과 지조는 일세의 사표이셨다. 이와같은 선생의 뜻을 길이길이 이어 받고자 그 모습을 여기에 새겨두고 우리의 거울로 삼으려 한다.” 이렇게 한결 스승의 76세 값진 일생을 학자 교육자 애국자로 살펴서 그 빛난 생애를 잘 요약해 적었다.
외솔 최현배(1894-1970) 박사와 함께 국어의 횃불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스승 밑에 국어교육을 잘 공부하셨다. 상동교회 전덕기(1875-1914) 목사가 세운 중등과정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마산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연희전문 문과 수료후 배화여고 교사가 되셨다. 모범교사가 되어 일본 입교대학 사학과에서 조선어 역사를 깊이 연구하시고 귀국하시어 다시 배화여고 교사로 복직하셨다. 애국가를 1907년 봄 평양에서 지으시고 독립일꾼 양성을 위해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조직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을 존경해 1922년 12월 3일 통상단우 서약을 하고 흥사단 단우번호 1036번을 받았다.
일제치하에서 조선민족말살을 위해 민족단체 흥사단사건에 연루되어 도산과 함께 옥고를 치루었다.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우리 말글얼을 없애려는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에 피고로 잡아 홍원경찰서로 끌고 갔다.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악랄한 고문을 겪었다. 한결 스승은 이 두 사건으로 9년에 걸친 송사 일 때문에 그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33명이 기소 되어 이윤재(1988-1943) 한징(1886-1944), 두 애국지사가 순국한 후에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함흥감옥 수감 인사들이 풀려나왔다. 광복과 더불어 한결 스승은 연희전문(뒤에 연세대) 교수가 되시고 백낙준(1895-1985) 총장이 공직과 개인사정으로 총장직을 두 번이나 맡겨드렸다. 학자로서 대학행정은 지장된다고 굳이 사양하시기도 했다.
5.16 군사정부 교육법에 따라 1962년도 정년퇴임 하셨다. 이듬해 신촌 창천동 자택에 세배드리러 갔더니 내게 경기 광주 고향에 가서 괭이 들고 흙이나 파려 했는데 한양대 숙명여대에서 또 학생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출강하신다고 했다. 한양대는 김연준 총장이 정년퇴임한 당신께 문리과대학 학장까지 맡겨 주셨다고 하셨다.
훌륭한 학자 교육자 애국자이신 한결 스승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여라(마 5:48)” 말씀으로 우리 제자들의 인격을 닦아 주셨다. 사회장으로 남한산성 건너편 경기 광주에 산소를 마련해 드렸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1963) 건국포장(1977) 건국훈장 애족장(1990) 등이 애국지사의 빛삶을 보여준다. 궁체서예 창시자 이철경 여사가 배화여고 제자이다. 연세대 노천강당 입구에 동상, 외솔관 1층 벽에도 한결 스승 얼굴상이 있다. 한결 스승의 거울같은 가르침이 이 어지러운 나라 거울이 되길 기도한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