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한경희 목사 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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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선교 개척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한경희 목사

교회 설립부터 교육·독립운동까지, 민족사랑 행적

각고의 노력으로 한경희 목사는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 석두하자(石頭河子),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派), 목릉현(穆陵縣) 목릉(穆稜), 팔면통(八面通), 그리고 밀산현(密山縣) 백포자(白泡子), 십리와(十里窪) 모두 일곱 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총회 전도국에서 노회의 전도 지역을 조정함에 따라 그는 남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 한경희 목사가 열과 성을 다한 노력으로 세운 교회는 이후 크게 성장했다.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道)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 가족이 유하현 삼원포로 이사해 삼원포, 해룡, 동풍, 서풍, 휘남면의 5개 현을 담당했다. 독립지사들의 망명지이기도 한 이 지역은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등을 통한 독립운동으로도 유명한 지역이지만 일찍이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즈(Harry A. Rhodes, 魯解理)에 의해 전도가 시작된 지역이었다. 그가 만주선교를 위해 올라가면서 만주 전도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포들의 생활상은 매우 어려웠는데, 한경희 목사는 전도하면서도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써 큰 존경을 받았다.

한경희 목사는 부임 후 그의 고결한 인품에 감동한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방기전(方基典)이 1912년 10월 10일에 설립한 은양학교의 2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의 지도로 은양학교는 1918년 학생 수가 8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1920년 일제의 토벌군이 독립군에 대한 보복작전을 벌여 간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 때에 학교의 설립자 방기전 장로는 순교했고, 학교는 불탔다.

한경희 목사도 이때 일본군을 피해 은신할 수밖에 없었으나 다시 삼원포로 돌아온 뒤 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은양학교의 정신은 만주 지역에 동포들이 설립한 군정기관인 정의부와 한경희 목사의 열성으로 1921년 개교한 동명학교로 이어졌다.

한경희 목사는 1922년 남만주 장로교의 총 책임자인 남만노회장에 선임되자 더욱 활발히 선교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그는 한인 청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학생들에게 기독교 의식과 민족정신을 가르치고자 했다.

1923년 유하현 지역 유지들과 남만노회 소속이자 평양신학교 출신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남만조선인교육회를 설립해 통학에 어려움을 겪던 한인 청년들의 교육수준을 높이고자 남만주 지역에 중학교 과정의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1926년 삼성중학교를 설립해 남만주 한인 청년들에게 수준 높은 근대교육을 제공했다.

한경희 목사는 목사로서 선교사업의 일환인 교육사업에 주력해 서간도에서의 기독교 발전과 한인 청년들을 위한 민족교육과 근대교육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민족진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국권 회복과 재만 한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썼다.

1924년 8월 이래 정의부 계통 학교인 유하현 삼원보 소재 동명학교 교장에 취임해 1928년 음력 6월 사임할 때까지 민족교육을 했으며,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목회 활동과 민족교육을 병행했다.

한편, 그는 여성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부임 직후 그가 시무하던 삼원포교회 지도자들이 1914년 10월 설립한 삼성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는데 경신참변 후 학교를 재건하고, 1928년 말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학교의 발전을 위해 계속 근무했다.

특별히 조선인의 딸이지만 중국인에게 부당하게 팔려가 고생하던 11세 진점순과 9세 박남순을 구하기 위해 평북 지역에 모금운동을 벌였으며 이들을 구출한 뒤 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후원하며 간도 사회 전체로부터 큰 추앙을 받기도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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