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함께하는 행복한 노년] 시대적 십자가, 우리가 져야 할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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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매주 어르신들을 위한 점심 식사를 준비해왔다.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이 노부부이거나 독거노인으로, 식사를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분들이다. 교회는 단 한 끼라도 고기 반찬을 넉넉히 제공해 어르신들께 건강을 드리려는 마음으로 준비한다. 그렇게 주어진 따뜻한 한 끼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위로요, 돌봄의 손길이었다. 어느 날, 식사를 나르던 중 눈에 띈 한 장면이 있었다. 구석자리에 앉아 계신 할머니 한 분이 식판에 담긴 밥과 반찬을 조심스럽게 검정 비닐봉지에 담고 계셨다. 그런 뒤 다시 줄을 서서 식사를 받으셨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궁금함과 안쓰러움이 겹친 마음에 필자도 식판을 들고 그 자리로 가 조심스레 여쭈었다. “할머니, 집에 누가 계세요?” 그 질문에 할머니는 먼저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뇌경색으로 몸져누운 남편이 집에 계신다고 하셨다. 자신은 파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데 남편에게 고기반찬 한 번 제대로 차려드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 나오는 귀한 고기반찬을 자신만 먹는 것이 죄스럽고, 남편께 드리고 싶어 몰래 봉지에 담아간다고 하셨다. 그 순간 검정 봉지 안에 뒤섞인 밥과 반찬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흘려보내는 남은 음식이 누군가에겐 한 끼의 정성이고 사랑이고 인생의 위로였다. 하늘이 슬퍼 보였고, 삶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가 돌봐야 할 예루살렘은 저 먼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우리 교회 안에, 내 식탁 맞은편에 있었다. 내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손을 내미는 마른 장작개비 같은 손. 그 손을 잡아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이 아닐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이는 단순한 감정의 호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해외 선교는 중요하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돌봐야 할 이웃이 지금, 여기, 교회 안에서 배고픔과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그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더 시급한 사명 아닐까? 특히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지금, 노인 성도들을 향한 관심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의 실질적 결정을 내리는 당회의 장로님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장로’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로로 세우셨을까? 회의 때 손을 들어 의결하는 역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마게도냐 사람처럼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의 곁에 함께 서서, 그들의 천국 여정을 평안하게 만들라고 우리를 세우셨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목자이며, 보호자다. 장로의 사명은 삶으로 실천하는 돌봄이다.

 감사하게도 정부도 노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6만 개의 정통 교회가 있고, 천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있다. 이 신앙 공동체가 연합한다면 정부와의 협력도 가능하며, 노인 돌봄에 있어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지금 이 시대, 장로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은 명확하다.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지금, 노인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시대적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무겁지만 기꺼이 져야 할 믿음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로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강채은 목사

<사랑교회, 前 한국교회노인학교연합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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