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잔치는 즐거운 일처럼 생각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생가(生家)를 떠나는 여자의 눈물이 있다. 딸을 떠나 보내는 친정 부모의 애틋한 서운함도 있다. 이 눈물, 이 애틋함이 있음으로 해서 신랑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때에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각오할 필요가 없다. 그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나니”
믿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은 흠없는 영혼이 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될 준비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 준비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세상을 떠나게 하지 않으신다. 그의 신랑인 어린 양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을 때는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죽어야 마땅할 때에 그로 하여금 죽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가 죽을 때는 그가 죽어야 할 적당한 때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안심하고 죽음에 임해야 한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주를 위해서이다.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큰 은혜이다. 만일 부질없이 삶을 원하다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죽어야 할 때 당하는 죽음은 광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죽음이 불행이라는 말은 믿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바울은 죽음을 원했다. 그의 소망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이 낳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내촌감삼(內村監三)의 외동딸을 18살에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몸이 아픈 것을 감추고 참다가 병이 깊어졌다. 8개월을 병상에 있었다. 우치무라의 고백이다.
“병은 루츠꼬의 육체를 멸하고 그 아이의 영혼을 구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병을 축복한다. 의사로부터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후 루츠꼬는 신앙적으로 훌륭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으면 그 아이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사(赦)하심을 받았다. ‘내 마음 속에 이제는 한 점의 원한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만 가겠습니다. 감사, 감사’ 한 마디를 남기고 12분 후 숨을 거두었다. 부모인 우리는 사랑하는 딸 루츠꼬를 천국으로 시집 보낸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처소로 갔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최상의 의복으로 그 아이의 관(棺)을 덮었다. 내게 남아있는 모든 야심을 루츠꼬의 유해(遺骸)와 함께 그 아이의 묘소에 묻었다. 딸 아이의 영면(永眠)으로 나의 마음에 남아있던 야심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나는 의지적(意志的)인 면에서 해삼(海蔘)처럼 무른 인간이 되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하겠다는 이외에는 아무런 의지도 없고 야심도 없다. 계획도 없고 나는 나의 사랑하는 딸과 함께 묘소에 파묻혔다.”
“내가 지금 육신으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아멘.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