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선교사 헌신과 신앙이 만든 호남 지역 복음화 길


그는 그냥 놀고만 있을 수 없는 남다른 데가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병원으로 방문하는 환자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진료 가방을 챙겨 들고 산간에까지 찾아 다니면서 진료에 임했다. 그러던 중 1905년 3월에 뜻하지 않게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겨우 생명을 건진 일도 있었다.
하루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완산군에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신음하고 있는 어느 대 지주가 있어 응급 조치를 하기 위해서 60리나 떨어진 곳에 가게 되었다. 그는 심한 상처를 입은 그 부잣집 주인을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은인을 만나게 된 이들은 보의사 선교사를 정성껏 모셨다. “선교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을 가지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인사를 하고 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전주 예수병원까지 간다는 것이 무리였다. 밤길이고 시골길이라 강도를 만나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이 분명해 그냥 가는 일을 포기하고 주인의 권유로 시골 지주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선교사님 누추한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희 집에서 선교사님이 주무시고 가는 것은 집안으로서는 아주 영광입니다.”
비록 누추한 시골집이지만 치료가 잘 되었다는 기쁨 때문에 어느덧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웬 사람들이 나타나서 번쩍이는 칼을 내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꼼짝하면 이 칼로 죽인다. 가만히 있어!”
이 소리에 잠에서 얼른 깬 보의사 선교사는 죽었다는 듯이 그들이 하라는 대로 꼼짝 못 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강도들은 어두운 밤이어서 보의사 선교사의 옷을 구한말 순사의 옷으로 잘못 보고 그를 칼로 마구 찔러 목과 귀에 큰 상처를 낸 후 황급히 도망쳤다.
불의의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어느새 전주 관가와 유생들의 귀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별세계의 사람으로 취급해 온 선교사들이 바로 자신의 친구인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보의사 선교사로부터 치료를 받고 생명을 찾은 전주 이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그 문중에서는 꽤나 높은 항렬에 속해 있었으며, 건강이 회복되자 곧 가마를 타고 전주 서문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모두들 놀랐다. 지금까지는 천민이나 일반 백성들만 다니는 기독교인 줄 알았는데 전주 이씨가 가마를 타고 전주읍 서문교회에 다닌다니 말이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한 그 전주 이씨가 직접 전도지를 들고 전주 장터에서 전도를 하니 서문교회에는 자연히 양반들도 출석하게 되었다.
한편 생명의 위협을 느낀 보의사 선교사는 전주 예수병원 시설로는 더 이상 치료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일시 귀국해야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주 이씨는 종들을 대동해서 보의사 선교사의 전송길에 나섰으며, 적은 액수의 선물이지만 정성껏 준비해서 보의사 선교사에게 건네주었다. 보의사 선교사는 그의 정성을 외면할 수가 없어 고맙게 받고 전주를 떠났다.
보의사 선교사와 함께 내한했던 다니엘(Dr. Thomas H. Daniel. 한국명: 단의사) 선교사는 군산 예수병원으로 부임했으며, 노란(Dr. Joseph Nolan) 선교사는 목포 프렌치기념병원으로 각각 부임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보의사 선교사의 사고는 호남 지방에서 일하는 모든 선교 동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크게 부상을 입은 보의사 선교사는 몸이 회복되어 다시 내한했다. 그는 노란 의료 선교사가 근무하고 있는 목포 프렌치병원에 근무하면서 오원 선교사 치료를 위해 광주로 가다가 뜻하지 않게 나주에서 여자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친히 자신의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갔는데, 이 일로 광주에서는 그를 성자처럼 여기게 되었다.
군산 예수병원과 의료 선교사들
이처럼 호남 지방에서 의사로 사역하고 있던 모든 의료 선교사들은 너무나 심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군산에 있는 군산 예수병원에는 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이 환자를 도울 만한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케슬러 간호 선교사가 내한하자 단의사 선교사는 무척 기뻐했다. 케슬러 간호 선교사는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계승한다면서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전도에 임했다.
단의사 선교사의 헌신적인 노고가 미국 선교 본부에 알려졌고 그 동안 군산 예수병원에서 활동했던 알렉산더(Dr. A. J. A. Al- exander) 의사는 개인 사정으로 귀국해 군산 의료 시설의 낙후됨을 교회마다 찾아 다니면서 호소했다. 그의 노력으로 1906년 병원 기금이 군산 선교부에 도착하게 되자, 단의사와 부위렴 선교사는 곧 구암 대지 위에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2개 동의 병동을 갖추고 진료에 임했는데 이 병원이 호남 지방에서는 최초로 지은 현대식 건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단의사 선교사가 전주로 이거하게 되었으며, 1910년에는 패터슨(Dr. J. B. Patterson) 의료 선교사가 군산 예수병원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산뿐만 아니라 때로는 금강과 만경강을 오르내리면서 강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고 중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군산 예수병원까지 우송해 친절하게 진료해 주었다. 이러한 관계로 금강 주변과 만경강 주변에는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며, 이 일로 패터슨 의료 선교사의 활동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각광을 받기도 했다. 패터슨 의료 선교사는 진료뿐만이 아니라 몰려오는 환자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큰 병원을 건축해야 한다면서 미국 선교 본부에 여러 번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안식년으로 일시 귀국하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부탁을 해 병원 건축 기금을 보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