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선교에 함께한 동역자들 (2)
구덩이에 빠진 사연
나에게는 꺼져 버린 눈동자에 남아 있는 상처가 있다. 자건거, 손수레, 열어 놓은 하수도, 그리고 전봇대….
이런 것들은 우리와 같은 장애인에게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것들이다. 시각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서 신체상 가장 고통당한 부분은 이마와 무릎이었다. 혼자 다니는 시각장애인 중 전봇대와 하수도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의 이마와 무릎 곳곳에는 상처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나의 오른쪽 눈 아래와 눈꺼풀에는 아직도 깊은 상처의 흉터가 남아 있다.
신학교 2학년 시절 어느 월요일이었다. 나는 신학교 생활관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침에 학교 갈 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으나 오후 시간 일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올 때 장애물이 있었던 것이다.
거의 학교에 다 왔을 때 내 등 뒤에서 어느 할머니와 초등학생들이 “어머, 저런!” 하며 소리쳤다. 그 순간 나는 한 길 넘게 파 놓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앞에 놓인 삽자루와 곡괭이 자루에 나의 오른쪽 눈과 이마가 찍히고 말았다. 몸은 흙범벅이 되었고 이마와 눈에서는 피가 흘렀다. 참으로 난처했다. 지나가던 어느 분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지켜보던 어느 아주머니가 흙을 털어 준 뒤 병원으로 데려다 주셨던 것이다. 내가 간 병원은 바로 광장교회 윤 장로란 분이 경영하시는 외과였다. 평소 장로님과는 안면이 있는 터라 일단 응급처치를 하고 마취 없이 아홉 바늘을 꿰맸다. 참기 어려운 심한 통증이 왔다.
‘도대체 누가 길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 놓았단 말인가!’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학기 중이라 출석을 못하면 학점도 못 받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억울하고 괘씸했다. 늘 내 옆에서 다정하게 도와주던 친구 유관선에게 도대체 누가 길 한가운데를 파 놓았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알아보니 신학교 앞 광장교회에서 수도관을 설치하기 위해 파 놓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사실을 병원장인 윤 장로님께 알렸더니 치료비를 광장교회에 청구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사흘 뒤 광장교회 담임목사님이 전도사님과 함께 심방을 오셨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치료비 일체는 교회가 맡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약속을 받은 후 나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게 될 흉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걱정되었다. ‘꺼져 버린 눈동자에 흉터까지 생긴다면 목회생활에 지장은 물론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선지학교에 보내 주시고 종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금까지 도와주셨는데 흉터도 없애 주실 줄 믿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그 흉터를 놓고 열심히 기도했다. 6개월이 지난 후 파였던 흉터에 새 살이 나오기 시작해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그 흔적은 안경과 눈썹으로 가려져 자세히 관찰하기 전엔 잘 모를 정도로 깨끗해졌다.
내가 광장교회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이 교회가 우리의 선교 사역에 앞장서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사랑하는 친구 이정일 목사가 광장교회로 부임하면서 약속한 대로 중도에 실명한 형제 자매들의 직업 훈련과 영성 훈련을 통해 이들을 위한 봉사에 앞장서고 있는 모범적 교회가 된 것이다.
매년 산재나 교통사고 및 질병으로 300여 명이 중도에 실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좌절하고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신앙을 얻고 자활할 수 있도록 광장교회가 나서서 돕고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육십여 평생을 살아오면서 괴로운 일도 있었고, 감사한 때도 있었고, 불행한 날도 있었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고, 보람있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달리 좋은 날보다는 괴롭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해 사역해 오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믿고 함께 일하던 동역자들의 배신도 있었고, 받지 않아도 될 비난과 조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하는데 큰 힘과 지식이 되었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1986년 2월, 그처럼 기대했던 실로암 안과병원을 개원했으나 수술에 필요한 기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토론토를 거쳐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까지 홀로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