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속에서도 빛난 독립의 꿈과 신앙의 각성”
신간회 (2)
신간회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태에서 일본의 지배권이 점점 강화되어가던 그 즈음 민족의식의 계몽과 식민지라고 하는 정치적 현실에서 독립과 자치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함께했던 단체였다. 아직까지 민주정치 내지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정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시대에 선각자들이 비록 식민지 상태이지만 독립과 자치권을 확보하겠다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결성한 단체였다.
즉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 민족주의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되어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부를 결성해 활동하는 단체로서 회원만 해도 3~4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당시로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옹립된 이상재 선생은 당시 기독교 쪽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서 대일항쟁을 주도하면서도 민족의식 고취와 신교육을 통한 미래의 조선을 꿈꾸면서 청소년 교육과 건강한 성년으로 양성하겠다고 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눈물이 겹도록 힘든 일이었다. 또한 국민들 가운데 농업이 직업인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계몽과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농민들의 관심이 신간회에 쏠리게 되면서 당시 전국에 신간회 회원이 4만 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 절반 이상이 농민이었다는 점도 매우 특별한 현상이다. 그만큼 신간회가 추구했던 것이 농민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간회에 대해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역설적이게 조선총독부였다. 그들은 이 단체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주목했고 감시하는 가운데 협박과 위협을 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했다. 신간회는 1)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2) 단결을 견고히 한다. 3)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등의 3대 강령을 전제로 행동했는데, 무엇을 하든지 피식민지의 국민으로서는 일제에 의한 통치가 그 근본적인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신간회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박해와 자유에 대한 방해가 있는 곳에 관심을 갖고 찾아갔으며, 그것에 저항하는 중심에 있었다. 결국 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사건과 같은 해에 있었던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간회가 앞장서서 피해자들과 함께 저항하는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신간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끝내는 1931년 5월 신간회 내부의 입장 차이로 인해서 스스로 단체를 해산하겠다는 입장을 취함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성감옥 터(영풍문고 빌딩)
일반적으로 한성감옥이라고 하는 곳은 이승만이 수감되었을 당시에는 서대문감옥(한성감옥) 종로 구치감이 정식 명칭이다. 그러나 본래는 이곳이 한성감옥이었고 서대문감옥이 만들어지고 한성감옥을 대신하게 되면서 바뀐 명칭인 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진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곳은 이곳이다.
즉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이승만 등의 인사들이 투옥되었을 때 사진에 한성감옥이라고 표기하는 데 당시 정식 명칭은 ‘종로 구치감’이다.
1899년 2월 1일 이승만은 이곳 종로구치감(한성감옥) 중죄수 방에 갇혔다. 큰칼을 쓰고, 손은 뒤로 묶였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진 채로 감옥생활을 했다. 같은 해 12월 특별 감형을 받아 종신형에서 10년 형으로 줄었다. 이듬해인 1900년부터는 독서와 집필이 허락되어서 그는 감옥 안에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29세에 석방되기까지 그는 그곳에서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꿈을 꾸면서 준비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감옥생활을 하는 중에 미래의 조선을 설계하고 있지 않았을까. 구체적인 로드 맵을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립운동과 건국의 방향’을 암시하는 글들을 옥중에서 썼기 때문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난 후 그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쓴 글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에는 조선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겼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남이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의식과 지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그는 그때까지 조선을 밖에서 볼 수 있는 배움이나 조선 밖의 세상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접근하면 더욱 궁금해진다. 그것은 바로 이 한성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읽었던 책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 ‘牖夢千字’(유몽쳔ㅈ、)를 읽었는데, 이 책은 게일 선교사가 미국독립운동사를 소개한 것으로 우남(이승만), 백범(김구), 월남(이상재) 등이 탐독했다. 또한 이들은 ‘태서신사’(泰西新史)라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 이 책은 프랑스와 영국의 의회정치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을 담은 것으로 특히 우남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특별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백범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증언이다.
또한 이들이 읽은 책 가운데는 ‘경학불염정’(經學不厭精)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서구 관점에서 유학(儒學)을 비판하는 것이고, ‘자서조동’(自西徂東)이라는 책은 서구 근대국가 정치체제를 담은 것이다.
한성감옥에 함께 투옥되어 있던 인사들이 어떤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는지에 대한 사실은 지난 2022년 월남 이상재 95주기에 그 후손이 기증한 ‘한성감옥 도서대출 장부’(1903년 1월~1904년 8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은 ‘유몽천자’로서 감옥에 투옥된 상태에서 독립협회 지도자들은 조선의 운명과 미래의 조선을 꿈꾸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서가 어떻게 월남 가문에 전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귀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한성감옥으로 알려진 이곳은 1896년에 결성한 독립협회가 1898년 12월 25일 고종 황제에 의해서 ‘만민공동회금지령’과 함께 강제로 해산되면서 그 주동자들 17명을 투옥시켰던 곳이다. 당시 체포되지 않고 도망쳐서 망명한 서재필과 같은 이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감옥 안에서 게일 선교사와 같은 이들로부터 지속적인 양육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혀 기독교와 복음을 몰랐던 이들이 그 안에서 복음과 하나님을 소개받고, 또한 신자로서 양육을 받는 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또한 그러한 분위기에서 세계정세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수감된 상태에서 그들을 의식화 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훗날 독립운동은 물론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식민지 시대의 우리 국민을 이끌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월남 이상재이다. 월남 등 지도자들이 개종해 출옥한 다음에도 게일 선교사를 찾아가서 신앙 지도를 받기 원했고, 게일이 목회하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로 변신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국민들에게 크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월남은 YMCA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고향 서천의 유생들에게도 개종하게 함으로써 한산을 중심으로 서천 지역의 복음 전도와 계몽,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