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선교] ‘전근대 한국행형사’ 중고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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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 장소에 대해서는 국가 초기부터 같은 위치였는지 여부는 판명되지 아니하지만 예종왕 무렵에는 남쪽 거리라고 하는 네거리에 있는 법사(형부)와 같은 장소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예종왕 즉위 해에 사면을 실시했고 그 때문에 영어(囹圄)의 빔을 고했고, 글을 청해 ‘옥공(獄空)’ 두 글자를 써서 법사(法司) 남쪽 거리에 게시했다고 한 적도 있었다. 또 1113년(예종 8년) 고려 태조가 건립한 개경10찰(開京十刹) 중 하나로 국가의 기원 법회와 도량이 자주 개최되곤 했던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가 환궁해 형부 남쪽 길에 이르자 죄수가 왕의 수레를 우러러보며 만세를 제창했다고 한 적도 있어서 형부와 같은 남쪽 길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구조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다만 그 규모는 매우 낮고 작은 집의 협소한 것 같았으며, 따라서 무리한 수용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당시 은전을 베푼 것이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은 이미 신라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심해졌다. 

그 원인은 옥사에 죄수가 가득 차서 그 범람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죄수의 건강 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때문에 죄수로 하여금 구금의 고통으로 원망과 탄식의 신음 소리를 그대로 두는 것은 천지의 온화한 분위기를 해치고 사계절의 불순(不順)을 초래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은전을 베풀어 수금의 어려움의 타개를 도모하려고 해서 당장 사면을 실시했다. 사면 후 잠시 지나면 또 원래와 같이 죄수가 옥에 가득 차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 거의 예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은전을 빈번하게 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따라서 결국 구금 설비의 불비와 불완전한 것에 귀착하는 이유이다. 

1355년(공민왕 4년) 사헌부가 상소한 한 구절에서 ‘전옥(典獄)은 죄인이 모인 곳이므로 여기(癘氣)가 답답하게 오염되어 병이 나기 쉬운데, 죄가 아니면서 죽으니, 몹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등등’이라는 말을 보더라도 그 말의 뜻 외에 설비의 불비, 수금 상태의 참담에 해당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서 헤아릴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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