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남궁혁 목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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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혁, 신학자이자 독입운동가의 삶

평양과 광주에서 펼친 신앙•민족운동

남궁혁(南宮爀)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인 그의 외조부 임형준은 평안감사를 지낸 고관으로, 고종 임금을 보필한 6승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했다. 경기도 용인으로 잠시 피란했고, 평안감사로 보임된 외조부를 따라 일곱 살까지 4년 동안 평양에서 자랐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일찍부터 한문을 읽은 그는 장원급제했다. 평양은 훗날 그가 신학자와 목사로 활동한 주요 무대가 된다.

열네 살 때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구한말 독립운동가 남궁억을 그의 멘토로 삼았다. 남궁억은 남궁혁보다 스무 살이 많은 함열 남궁 씨(咸悅 南宮 氏) 집안의 어른이었다. 일제강점기 유명한 선각자이자 계몽운동가인 남궁억은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독립정신 고취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사상적, 정서적 세례를 받은 남궁혁은 1939년 남궁억이 일제의 고문 끝에 숨지자 상주 노릇을 자임하기도 했다.

남궁혁의 청소년기에 우리나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있었다. 한말에 친러시아 정책을 쓰던 명성황후를 일본 자객이 시해해 한일의정서를 성사시켰으며, 후에는 일제가 고종 황제를 위협해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민족적으로 위태한 때에 남궁혁은 초기 한국 교회가 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남궁혁은 배재학당 졸업 후 공직에 있으면서 목포세관 세관장까지 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이때 남궁혁은 언더우드와 에비슨 선교사의 부탁을 받은 정신여학교 교장의 소개로 명문 집안 규수를 만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되어 사랑방을 빌려주고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가 설립되게 한 김윤방의 딸, 정신여학교 출신 김함라와 남궁혁은 게일(J.S. Gale) 선교사의 주례로 1908년 서울 연동교회에서 결혼했다.

김함라는 독립운동 가문 출신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조선으로 가져와 전국에 배포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큰언니이자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으로 중국에 망명해 조선독립군의 군의관으로 활약한 김필순의 조카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김함라의 고모부였다.

김함라를 비롯한 주변의 노력에 힘입어 남궁혁은 늦깎이 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917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2년 제15회 졸업과 동시에 광주 양림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의 인생 역정은 평탄했을지 모른다.

남궁혁이 목포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외국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파송 변요한(Rev. John Fairman, Preston 邊要翰, 1875~1975)이었다. 남궁혁은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 목포 양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고 신앙훈련을 받던 중 선교사의 권고로 목포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영흥학교 영어 선생으로 취직했다.

남궁혁은 머리가 비상했다. 어학에서는 거의 천재적인 기량을 나타냈다. 영어는 물론이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 16세기 킹제임스 영어 등을 구사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들은 민족 각성의 수단으로 미국 청교도 정신을 연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을 가르쳤으므로 그의 의식 저변에도 민족주의가 깔려 있었다.

남궁혁은 광주 3·1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목포의 변요한 선교사가 1909년 광주에 있는 숭일학교(崇日學校) 교장으로 가고 남궁혁도 숭일학교 학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 현 광주제일교회)에 출석했고, 1916년 4월경 광주 양림교회에서 동료인 이득주와 함께 장로가 되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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