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이야기] 신앙으로 농촌운동의 선구자

Google+ LinkedIn Katalk +

배민수(1896-1968) 목사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무관출신 배창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자 의병을 모집해 일본에 저항을 하다가 미국 북 장로교 밀러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부친상을 당해 졸지에 고아가 되어 선교사 가정에서 가사 일을 돕게 되었다. 배민수는 1912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해 기독교 사상과 민족의식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는 학생 30여 명을 모아 애국계몽 단체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1918년 전원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 후 출옥해 1919년 3.1 만세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다시 투옥되었고 출옥해 다시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사회복지 계몽운동을 연구해 귀국 후 장로교 총회 농촌부를 조직해 1920년대 피폐한 농촌을 갱생하기 위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면서 미국의 어느 부인이 기부한 거액이 농촌운동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농업강좌, 농촌계몽과 더불어 노회 단위로 농촌부를 조직해 ‘예수촌’이라 이름했다. 이 운동을 자율적으로 하되 신앙을 중심해 농촌공동체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1935년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어 큰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사회운동이라고 핍박해 농촌부가 해체되고 배민수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갔다. 그 후 해방되어 귀국해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가 건설의 농촌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의 농촌운동의 정신은 전국적으로 사회적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58년 기독교 농민학원을 설립해 농촌운동을 하다가 1968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던 농민학원과 농장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해 하나님사랑, 민족사랑, 농촌사랑, 삼애(三愛)의 정신을 기리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기본으로 해 일제부터 해방 후까지 농촌에서 신앙공동체를 시도한 기독교운동의 선구자이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