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남궁혁 목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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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혁의 개혁신학과 통합의 길 모색

신학으로 교단 분열시키지 않은 포용

교단 분열은 신학의 문제였다. 신학이 어떻게 교단을 분열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참으로 신학자들의 오류였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가 편을 가르고 말았다. 신학자들이 신학으로 교단을 분열하는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남궁혁의 신학은 결코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성실하려고 온몸으로 노력했으며, 그 가르침을 실생활에 실천하고자 전심전력을 다했다. 이 같은 노력은 그가 전개한 기독교 정화 운동을 통해서도 꽃을 피웠다. 그는 “조선교회는 겨우 반세기도 지나지 못한 기간에도 늙을 대로 늙고 상할 대로 상해서 그 가련한 병적 상태는 가히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치 되었다”라고 한탄하면서 정화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그의 신학은 많은 사람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주었는데 “일하러 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일심 단합”, “그리스도의 일꾼인 우리”, “그리스도를 평범한 생애에서 봉사하자”, “도끼날 잃은 일꾼”, “영생 얻은 회개” 등의 설교는 당시 할 일 많은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사명감을 일깨우고 청년들로 사회봉사에 매진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남궁혁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원리에 충실히 서 있었다. 그는 개혁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적 근거를 칼뱅에게서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칼뱅을 단지 교회 신앙생활의 기초 위에서만 그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 범위를 정치 생활과 과학과 예수와 인간 삶의 미래 전반에까지 넓혀서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개혁신학의 원리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기독교 사상에서 바울 다음가는 중심적 인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했으며, 그 영향력이 중세를 이어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내려왔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그가 기독교 사상의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은 성경의 정경론,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는 이런 정통신학에 서서 기독교 이단에 관한 연구도 병행하면서 단성론을 경계했다.

그는 오랜 기간 <신학지남>의 주간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실었다. 비록 그 자신은 칼뱅의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신학에 서 있을지라도 당시에 근본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이나 혹은 그 반대로 급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경향성을 가진 분들에게도 집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기품이 있는 유교적 전통가정에서 성장해 자연스럽게 중용(中庸)의 도(道)에 익숙한 그의 인격에서 우러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포용과 수용의 덕을 갖추고 당시 신학계가 좌와 우로 나누어져서 논란을 벌이던 시절에 과감하게 대화와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 그는 신학적 독선과 아집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상호 존중이라는 큰 인격의 틀에서 한국 신학이 통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성경 번역작업을 초교파적으로 추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오늘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공인 성경도 그가 번역작업을 주도해 1937년 발간한 신약전서 개역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기록에서 모두 사라졌고, 이제 손자가 그의 노력을 더듬는 상황이 되었다.

남궁혁 목사의 설교 중에 “끝까지 힘쓰자!”가 있다. 그 결론에서 “여러분은 불가능이란 말을 사전에서 빼야 한다. 나폴레옹의 호언장담을 기억하는가? 나는 한글 사전에서는 ‘실망’이라는 말을 빼버리라고 주장한다. 한국 청년에게 실망이란 금물이다. 바라보니 여러분은 오직 대장부가 되어 촌보(寸步)도 퇴보하지 말고 오직 우리 대장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한 마디에 절대복종하여 일보, 일보 나아가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또 여러분은 자라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서 몇 마디 말을 했다”라고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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