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철아 네 몫까지 열심히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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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시각장애인선교를 위한 헌신예배를 동안교회에서 드렸다. 서울중학교 음악 교사에게 찬양을 잘하는 학생을 출연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그 선생은 수철이를 추천했다.

시각장애인선교를 위한 헌신예배를 드리는 주일 오후가 되었다. 그는 그의 형과 함께 종로 5가 기독교회관 805호실로 왔다. 나는 지하 식당에 내려가서 그와 함께 갈비탕을 먹고 동안교회로 향했다.

고 한기원 목사님의 설교 후 순서에 따라 수철이가 나와서 600여 명의 성도들 앞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그런데 연주 도중에 수철이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모두 놀라서 수철이를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내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송치현 목사님께서 “김 목사! 수철이가 죽었어.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갔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웬일인가. 택시를 타고 급히 서울대학교 병원 영안실로 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 뒤 나와 그의 형 수덕이는 청량리 경찰서에서 조사한다고 해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아 밤에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혹시나 수철이가 살아났을까 하고 서울대학교 병원 영안실로 갔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차라리 내가 생명이 끊어졌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다.

그 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여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영결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관 앞에서 조사를 하며 수철이와 약속했다.

“수철아, 네가 다 못하고 간 플루트를 내가 배워 열심히 연주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너를 항상 생각할게. 수철아, 미안하다. 너는 하나님 품에 가 있겠지. 뇌종양도 없고 실명도 없는 하늘 나라에 가 있을 너의 모습을 그린다.”

용인공원 묘지에 그를 안장했다. 귀가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철이가 다시 살아나서 나의 뒤를 따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한인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받은 감사 사례비로 싸구려 플루트를 사서 일년 동안 홀로 사무실 8층에 새벽 일찍 나와 건물이 떠나가도록 연습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던지 밤에도 플루트를 부는 꿈만 꾸었다. 내가 제일 먼저 연주한 곡은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였다.

이기경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경동제일교회 수요예배에 가서 연주한 후 용기가 생겼다. ‘하면 되는구나’ 싶어 더 열심히 연습했다. 그 후 미국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서도 찬송가 한 곡씩을 연주하곤 했다. 지금도 나의 사무실에는 그 플루트가 있다.

오늘의 시각장애인선교와 실로암 안과병원이 있기까지는 수철이의 순교가 있었으며 희생과 멸시, 천대와 불신도 참으로 많았다. 돕지도 않으면서 방해하는 사람, 주지도 않으면서 괴롭히는 사람, 혹시나 부정이 없나 하고 흑심을 가지고 덤벼드는 사람 등 별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순교자도 있었고 순교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바치는 인물들도 있었다. 한국 20만 시각장애인과 500만 실명 위기에 처한 저시력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된 수철이를 생각하며 그를 그려 본다.

‘수철아!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선교를 시작하면서 뼈를 도려내는 괴로움도 적지 않게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믿음과 젊은 패기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아무래도 지방 교회 목사님들과 교인들에게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심어 주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에 가까운 동역자들과 연락하고 부산, 대구, 포항, 광주 등 대도시에서 시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대부흥집회를 하기로 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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