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난세에 퇴계 이황을 생각하며

Google+ LinkedIn Katalk +

오늘날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풍요롭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병색이 완연하다. 정치권은 진영 논리에 갇혀 국민의 삶보다는 권력의 향배에만 몰두하고, 종교계는 도덕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채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의 혼란 속에서 벼슬을 70여 차례나 사양하며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는 “벼슬함은 도를 행하기 위함이지, 녹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모두 의(義)에 따라 결정했다. 오늘날에도 퇴계처럼 뜻을 품고 세상과 거리를 두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정치의 타락과 종교의 변질을 목도하며,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이들의 침묵은 결코 무관심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에 대한 깊은 애정과 동시에, 그 애정이 배신당한 데서 오는 고통의 표현이다. 

일본계 미국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교수는 ‘신뢰의 적자(赤字)’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도덕적 해이와 윤리적 타락은 ‘신뢰 마이너스 사회’를 낳는데, 이는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의 보스를 중심한 패거리 정치가 ‘신뢰 마이너스 사회’를 만들고 있으며, 도덕적 사표가 되어야 할 종교계마저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 문화계, 금융계까지 총체적으로 썩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퇴계처럼 ‘은둔의 선비’가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 타락한 시대에 퇴계가 많아지고 있다. 화를 당할까봐 두렵고, 바른 소리가 존중되지 못하는 패거리 정치가 싫기 때문이다. 뜻있는 사람들이 모두 낙향하는 마음으로 보스 권력과 거리를 두고 정치에서 발을 빼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퇴계 선생의 때와 다르지 않다. 권력을 잡은 무자격자들의 오기의 소리가 공해처럼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을 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퇴계는 단지 은둔한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도산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켜 조선 도학의 틀을 마련했다. 그는 예안향약을 통해 향촌의 풍속을 교화했고, 손수 교과서를 만들며 교육의 방향을 바로잡았다. 퇴계의 은둔은 도피가 아니라 실천이었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났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중심을 세웠다. 오늘날의 ‘은둔의 선비’들도 퇴계처럼 침묵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