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도착하면 많은 친구들이 마중을 나와 환영해 주고 숙소까지 안내해 준다. 다행히 미국에 가면 동역자들이 자신들의 집에 와 있으라고 잠자리를 허락해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숙소가 걱정되지는 않는다.
또 수요일, 금요일, 주일, 철야기도 등에 설교 청탁을 받아 말씀을 전하면 사례금도 주고 선교비도 모아 준다. 어떤 분은 일년 내내 아기를 봐 주고 받은 돈을 모아 개안 수술비에 보태 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어딜 가나 모두가 환영해 준다. 미국 뉴욕의 경우는 특히 동역자들이 많아서 머무를 곳이 많다. 그런데 뉴욕에만 가면 내가 반드시 머무르는 가정이 있다. 개혁 교단에 속한 신광교회 한재홍 목사님의 가정이다. 그 목사님의 집은 이층이다. 집 구조가 지하실과 일층, 이층으로 되어 있는데 지하실에는 책상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목욕실도 있다. 또한 메주도 있어서 메주 뜨는 냄새가 구수하게 나기도 한다. 특히 온방 장치가 지하실에 잘되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품속보다 더 따뜻하고 어느 양지 바른 곳보다도 따스하다.
어느 겨울, 눈이 무릎까지 차도록 오는 추운 날씨였다. 어느 교회에 가서 밤늦게까지 설교하고 숙소로 돌아와 지하실로 들어가니 얼마나 따뜻했던지 마치 천사의 집같이 느껴졌다.
내가 어느 곳을 가거나 말씀을 전하고 나서 주어지는 사례금은 우리 교민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동역자들과 만나 점심을 나누고교통비, 가스비, 국제전화요금 등으로 지불한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다.
도움을 받고 베풀고 사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인생을 너그럽게 살면 그 너그러움이 다시 내게 오고 각박하게 살면 모든 것이 각박하기 마련이다. 나는 사심과 욕심 없이 모든 일에 깨끗하게 살고 싶다. 또 모든 사람과 나누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런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내가 그런 삶을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어느 곳에 가든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주셔서 차 태워 주시고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고 개안 수술비로 돕도록 해주신다. 도와주신 분들은 모두 어두운 세상을 밝게 변화시키는 천사들이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스승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까
나를 아껴 주시던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다. 시각장애인이 몇천 명의 정상인 학생 속에 끼어 그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교과서도 없고 칠판에 써 놓은 글씨도 읽기 어려운 점 등 내게는 여러 가지가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고 꿈을 주셨기 때문에 불가능하게 보인 일들이 가능했다. 또한 나를 지극히 아껴 주시고 도와주신 스승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모든 선생님께서는 늘 나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곤 하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잘 도와주어서 지도자가 되게 할 수 있을까 하며 애쓰셨다. 그중에서도 이정두 선생님, 황진섭 선생님, 김인성 선생님, 이성엽 선생님, 계단열 선생님, 물리·수학을 가르치시던 최 선생님, 국어를 가르치시던 김 선생님 등이 기억난다.
이분들 중에서 이정두 선생님, 황진섭 선생님, 김인성 선생님의 은혜를 특히 잊을 수가 없다. 토요일이면 이정두 선생님께서는 나를 부르셔서 저녁도 만들어 주시고 커피도 주시고 별도의 강의를 해주셨다. 여름 방학 때면 일주일 동안 집에 데려가 놀게 하면서 특강도 해주셨다.
더욱이 잊지 못하는 것은 국가고시 원서가 거부되었을 때 내 손을 잡고 문교부에도 같이 가 주셨던 것이다. 설 때가 되면 불러서 떡만둣국을 끓여 주시고 몇몇 친구와 더불어 윷놀이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용돈도 주시고 양말과 장갑을 사 주시면서 동상 걸리지 말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있다.
살아 생전에 그분들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지도자가 되어 교계와 사회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 되어 스승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큰 보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승님들 고맙습니다. 꺼져 가는 등불처럼 희미한 제게 큰 꿈과 용기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친형제보다 가까운 친구의 우정
친구의 우정을 그리는 마음은 내게는 특별한 감회가 뒤따른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친구의 우정과 사랑을 조용히 돌이켜본다. 고등학교 시절, 집이 없었던 나는 학교 다닐 곳이 마땅치 않았다. 수유리 시각장애원에 방 한 칸을 얻어 거기서 학교가 있는 후암동까지 다니자니 차를 세 번씩 갈아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