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위험을 느낄 만큼의 좌우 정치적 대립과 이념적 편향의 위험을 느낀다. 알만한 사람들이, 더욱더 목사란 사람들이,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이 정말 정상적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될 만큼 편향된 글을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낸다. 자신이 반대하는 대상을 비난하는 사람은 다 자기 편이고 자기 편이 하는 말은 다 옳은 말이라는 식의 이중적 사고방식 정서적 혼란 때문에 세상을 더욱더 혼란스럽게 한다.
무엇이든지 기준이 표준화되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온다. 길이를 측정하는 자(尺)가 잘못되면 정확한 길이를 측정할 수 없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錘)이 잘못되면 무게의 경중(輕重)을 측정할 수 없다. 그건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치 기준에 착란(錯亂)을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의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선악의 구별 능력이 상실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선악을 가리게 되며 자신의 이(利)를 의(義)의 표준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뭐가 잘한 것이고 뭐가 못한 것인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그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없이 자기 유익한 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손을 들어 준다는 것은 심각한 윤리의식의 혼란이며 이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결국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어진다.
사물을 바로(正見) 보지 않고 자신의 이(利)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는 이런 시각을 우리는 사견(私見)이라고 한다. 자기 생각으로 해석해서 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관점(私見)을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고 사견을 정견(正見)으로 표준화하려는 무서운 착각이다. 그래서 누가 훌륭한 사람인지 누가 나쁜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 기준을 잃어버린다. 때로 그것이 정견(正見) 앞에 맞닥뜨려져서 숨겨진 자기 야욕과 야심 그리고 비뚤어진 자기 생각이 폭로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 거짓 진리에 속고 넘어진다. 이런 류의 사람들일수록 정의와 바로됨을 표방하기 때문에 식별이 더 어렵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견(正見)이다.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고 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견(私見)이 아니라 정견(正見)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확한 윤리 기준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불이익을 당해도 분명한 윤리의식과 바른 신앙 태도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기준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특히 이 나라 각계(各界) 지도자들이 그렇고 특히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늘 깨어있어 자신의 사고와 의식의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흐려진 눈을 닦고 혼미해진 윤리 기준을 바로 세우는 자기 성찰을 통해 이기적 자기 기준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에 순복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거룩한 일은 거룩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윤리 기준이 정확하며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눈이 정확(正見)해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정도(正道)를 말하고 정도를 보여줘야 한다. 사고나 행동의 표준이 하나님의 다림줄(암 7:7)에 근거해야 한다. 문제나 사물을 바로봐야 한다. 바른 언행은 바른 시각의 표현이다. 욥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고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한 자신을 회개(욥 42:3)함으로 잃어버린 축복을 회복했듯이 이 나라 지도자들, 특히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바른길을 찾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또 가르쳐야 한다. 사견(私見)을 절대시하는 자기 아집에서 과감히 벗어나 정견(正見)을 가지고 정도를 걸어가고 또 정도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시대가 위태로운 이때 지도자들이 먼저 똑바로 보고 똑바로 보여줘야 한다.
이만규 목사
<신양교회 원로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