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옥서는 처음 종로 부근인 서린방(瑞麟坊)에 설치되어 그 이후 수백 년의 오랫동안 위치 변경을 시행한 적도 없이 그대로 근세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세종왕이 반포한 안옥도 등에 따라 다소의 증감과 개수는 있었지만 대체로 옛날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해 온 것이었다. 그것이 조선시대 말엽에 이르러 서정개혁을 실시했을 때 옥사와 부속건물만은 근본적으로 개축되었으며 그 때문에 거의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릴 정도로 일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개축 이전의 옥사 구조는 보통 가옥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으나 설비의 만듦에 이르러서는 매우 협소했고 또 상판도 깔려있지 아니할 정도로 거친 것으로 매우 비위생적인 것 같았다. 또 그 위치도 지형이 밑이 낮았으며 뒤쪽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있고 홍수 시에는 침수의 불행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아서 역대 국왕은 옥사 개수를 명하는 영을 내리기에 이른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세종왕 때 안옥도를 반포해 안옥의 건축 표준을 제시한 것과 같이 1519년(중종 14년)에 형조판서 김정(金淨)을 불러 묻기를 ‘요즘 들어 죄수가 사망하는 일이 아주 많다고 하니 내가 몹시 측은하게 여긴다.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자 김정이 이에 답해 아뢰기를 ‘영어(囹圄)가 좁아서 공기가 막히고 통하지 아니해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증설(增設)해 넓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자도 있으나, 신은 사구(司寇)의 직에 있어 이상적인 형정을 이루지 못하고 옥을 증설하기를 청한다면 무엇을 하는가라고 하는 사방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래도 왕은 듣지 아니하고 옥사의 증축을 실시하도록 명했다는 것과 같이, 1707년(숙종 33년)에 우의정 이이명(李頥命)은 ‘전옥(典獄)은 지세가 낮아서 홍수 때 죄수가 습한 곳에 거처하게 되어 병이 생김을 피할 수 없어서 예전부터 판자를 깔아놓은 여러 칸 외에 만약 선공감(繕工監)에 있는 깔판자 40~50입(立)을 인수받는다면 모두 깔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해 깔아야 하고, 이는 휼수의 길로 공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각 아문에도 명해 시행하도록 함이 어떠할지요’라고 한 것에 대해 왕은 즉시 윤허를 내린 것과 같은 것은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성기 목사 <세계로교회>
한국교도소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법무부 사)새희망교화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새희망운동본부 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