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나도 그녀와 더불어 찬송을 불렀다. 나는 여 승무원에게 친구가 반드시 오니까 걱정 말고 가서 당신이 할 일을 하라고 권했지만 괜찮다고 하면서 “나는 한국에서 온 김선태 목사를 끝까지 보호하고 도와줄 책임이 있으며 내가 당신을 도와줌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친구 박 목사가 도착했을 때 그는 오히려 내게 “기다리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주소를 받아 두었다가 한국에 돌아와 예쁜 블라우스를 사서 선물로 보냈다.
나는 국내선을 탈 때마다 탑승하는 순간부터 불친절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도움을 청하면 모든 승객이 내린 후에 마지막으로 내리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약자나 어린이를 동반한 사람이 먼저 탑승하고 내릴 때도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승무원들도 선진국처럼 속히 ‘장애인 우선’의 친절을 베풀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수용소 탈출
나의 어린 시절은 거지왕자의 삶이었다. 어느 날 부대 안에서 지프차가 나오더니 날더러 타라고 했다. 차 안에는 대위인 종군목사와 운전병이 타고 있었다. 영어로 ‘굿모닝’ 하면서 나의 손을 반갑게 잡아 주는 것이었다.
부대에서 20여 분 남짓하게 차를 타고 달렸다. 어느 자그마한 집에 도착했다. 그곳은 일선에서 전투를 하다가 중상을 입은 병사들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후송되어 오는 수용소였다. 약 100여 명 정도의 중환자들이 모여 있어 밤이면 여기저기서 환자들이 아프다고 고함치고 욕설을 퍼붓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곳에는 두 팔이 없고 눈이 안 보이는 환자, 너무 심하게 다쳐 곧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리 하나가 절단된 사람, 한 손이 절단된 사람, 허리에 총을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람 등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밥을 떠 먹여야 했는데 상태가 조금 나은 사람들은 자기 식사를 먼저 먹어 버리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다가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멀쩡하고 괜찮은 편에 속했다. 왜냐하면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두 팔이 있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자유스러웠다. 식사는 아침, 저녁밖에 주지 않아 낮에는 우유 한잔으로 끼니를 대신해야 했다. 마치 호랑이 굴 속에 들어 와 있는 것 같았다.
이곳도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것 같아 또다시 뛰어나가 거지로 돌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낮에 도망하다 잡히면 아무도 모르게 반죽음을 당하는 곳이라 나갈 궁리를 하고 있던 차에 마침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면회를 오셨다. 그분의 아들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그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분들이 나를 데리고 나가 호떡을 사 주고 밥을 먹여서 들여 보낼 테니 잠깐 데리고 나갔다가 오겠다고 경비에게 부탁했다. 허락 받은 나는 그분들과 그 수용소를 빠져 나왔다.
바깥 날씨는 매우 추웠다. 삭막한 겨울날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용산역으로 갔다. 그때는 지나가는 트럭이 있으면 손만 들어도 잘 태워 주었다. 전쟁 때였지만 인심이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았다.
용산역에 내린 나는 거기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도움을 청하며 거지 생활을 했다. 만일 삼각지나 이태원 미군 부대로 다시 가면 그 종군목사에게 미안하고 또 수용소로 보내질까봐 멀리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동대문 방향으로 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오랫동안 거지생활을 했다.
억울한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이 한평생 살다 보면 까닭없이 억울함을 당해 분노가 치밀어 올라 땅을 치며 울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누구보다도 억울함을 많이 겪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신학교를 마치고 시각장애인교회를 시작했을 때 나의 삶은 참으로 암담하고 캄캄했다. 나는 이미 가정을 이루어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고 단칸방에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 당시는 당장 먹고 살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영어 개인 지도를 하거나 미국에 가서 취업하려는 간호사들을 모아 놓고 영어 회화를 지도해 생활비와 교통비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