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맞서 신사참배 거부한 정일선 목사
김선량 장로,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
어느 날 느닷없이 젊은 형사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세 통의 서약서를 정일선 목사 앞에 내놓았다. 한 통은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통은 신사참배를 고려하겠다는 서약서였고, 마지막 것은 신사참배를 절대 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일선 목사는 마지막 서약서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서명했다. 정일선 목사의 기백이었다.
정일선 목사는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사리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45년 8월 14일이었다. 점점 순교의 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일선 목사는 그 길을 망설이지 않고 힘있게, 굳세게 나아갔다. 순교를 각오하는 출사표였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그렇게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할 수 없었다.
일제는 반체제 교역자들을 1945년 8월 16일을 기해 피의 숙청 혹은 처형을 감행하려 했는데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항복하게 되므로 무위로 끝났다.
한편 정일선 목사가 안악읍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를 끝까지 후원하고 같은 신앙으로 밀고 나간 분이 있었다. 그는 김선량(金善亮) 장로이다. 그는 1899년 황해도 안악에서 김용제의 아들로 출생해 고향에서 안신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부친인 김용제(金庸濟)는 황해도 재산가로서, 1911년 안명근 사건 때 간도에서 독립운동하던 안중근의 종제인 안명근이 군자금 모금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해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일과 관련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선천의 지사들로부터 선천 신성학교에 대한 교육이념을 듣고, 1915년 출옥 후 아들 선량을 선천으로 보내 신성학교에 입학하게 했다.
김선량이 안악 고향 교회에 왔을 때 정일선 목사와 끝까지 함께했었다. 그리고 정일선 목사가 안악읍교회를 떠났을 때 그는 1920년 신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남경으로 가 금릉대학에서 공부했고, 귀국 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했다. 1927년 안악읍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한 후 교회를 위해 충성했다. 정일선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할 때 함께했으며, 민족독립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정일선 목사가 체포되었을 때도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정일선 목사를 위해 기도하며 석방을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했다. 그리고 안악중학교, 선천농업학교 이사로 활약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0년에는 김구 선생의 모친 상해 밀항 사건과 관련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전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교육과 종교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정일선 목사와 함께 과감하게 신사참배를 거절했으며, 반대 운동을 했다. 정일선 목사는 이렇게 신사참배를 반대할 때 같은 마음으로 함께한 김선량 장로 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더욱 용감해질 수 있었다. 김선량 장로는 월남 후 1947년 미 군정하에서 원주 군수를 역임했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강릉중·상업학교 교장을 거쳐서 1949년 강원도 사회국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는 전국 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의 서울 대표로 일했다. 1967년 서울 해방교회 장로로 취임했다. 1962년부터 1979년까지 황해도 도지사로 일했으며, 해방 전부터 관계해 온 흥사단 이사로 일했다. 안악읍교회의 김선량 장로는 한국 역사에 길이 기억되었다.
해방을 맞아 풀려난 정일선 목사는 재령 동부교회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내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청빙이 와서 산정현교회로 옮겼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