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현교회로 부름받은 정일선 목사
정일선 목사는 북한교회 최고의 지도자로 변신했다. 무슨 지도자인가? 그는 주기철 목사와 김철훈 목사의 후임이었다. 순교자의 길을 갈 지도자의 길이었다. 왜 정일선 목사는 하필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수락했는가? 그리고 산정현교회는 왜 정일선 목사를 청빙했는가? 산정현교회와 정일선 목사 간에 어떤 내용이 서약되었는가? 추측하건대, 주기철 목사와 김철훈 목사가 순교를 당했는데 산정현교회의 사정을 알고도 그 뒤를 갈 수 있겠느냐 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정일선 목사는 산정현교회를 향해 어떤 다짐을 받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두 선배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 굳게 섰을 때 나를 지지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제65회 황해노회가 황해도 재령교회에서 모였다. 회의장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다. 총대들의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총대는 일제의 위협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한 사람도 있었고, 또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었고, 일제에 빌붙어 다니면서 교회를 괴롭히던 사람까지 있었으니 해방 후 처음 모이는 노회가 즐겁기보다 한없이 무거웠다. 8·15 해방이 되자 신사 불참배 목사 중에는 영적 교만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때에 정일선 목사는 해방 후 모인 황해노회 석상에 나타났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가 감옥생활을 한 사람도 아니었다.
황해노회는 분위기가 어수선한 중에 개회를 선언했다. 회의가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은 정일선 목사가 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회장!”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강단 앞에 서서 청중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서 사과의 말씀부터 올립니다. 이 불초한 종은 환란의 날에 산중에서 평안히 지냈으나 교회를 지키다가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정일선 목사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노회장은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들은 통곡으로 회개했다. “서로 사랑합시다. 아무도 그 누구를 정죄하지 맙시다. 예수님도 가룟인 유다를 정죄하지 않았음을 본받아 회개하는 영혼을 사랑합시다.” 폭발 직전의 황해노회는 정일선 목사의 신앙인 다운 처신에 사랑으로 뭉치는 화합된 모습을 보였다. 정일선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인사할 때 조금 전까지 “회개운동”, “재건 운동” 하면서 떠들썩하던 노회는 금세 숙연해졌다. 6년간의 그의 은둔생활을 자백한 순간이었다. 숙연해지면서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화해가 이루어지고 정일선 목사는 고향 교회를 떠나서 평양노회로 적을 옮겼다.
산정현교회는 이미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제단이요, 얼마 전 김철훈 목사가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한 제단이었다. 이 제단을 담임하게 된 정일선 목사는 이미 그때 순교를 각오했던 것이다.
여기서 산정현교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산정현교회는 평양 장대현교회를 모 교회로 해 1906년 1월 7일 선교사 번하이셀(C.F. Bernheisel: 片夏卨, 편하설)을 담임목사로 분립되었다. 편하설 선교사는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평양 대부흥의 주역이었으며, 한국을 사랑한 목자였다. 산정현교회는 편하설 목사를 중심으로 영수 계택선(桂擇宣), 이덕환(李德煥) 집사, 최정서(崔鼎瑞), 김용흥(金龍興), 정리도(鄭利道), 권사 이신행(李信行), 조사 한승곤(韓承坤) 등이 주축이었다.
이승하 목사
<해방교회 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