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 그 이름으로 걸어온 길”
‘하람’으로 버텨온 고위한 원로장로의 신앙과 삶

“하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이름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이름은 목사님이 지어주셨어요. 그래서 늘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한성하람 회장 고위한 장로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한 우물을 파며 재봉사 제조의 외길을 걸어왔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지키려 애써 왔다. 출발은 가난이었고,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며, 위기는 반복해 찾아왔다. 그럼에도 고위한 장로의 삶에는 한 가지 기준이 남아 있다. 상황이 바뀌어도 내려놓지 않으려 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다. 이 다짐은 말에 머물지 않았다. 회사의 이름이 되었고, 삶의 방향이 되었다.
▐ 배고픈 어린 시절, 교회는 삶의 자리
고위한 장로는 경북 영덕의 매정리라는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넉넉지 않은 형편 속에서 남은 기억은 한 가지 감각으로 모인다. 배고픔이다.
고위한 장로에게 교회는 신앙 이전에 삶을 버티게 해 주던 자리였다. 이 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모교회인 영덕 매정교회가 산불로 전소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위한 장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고, 은혜를 갚는 일에 계산을 두지 않았다.
“고향교회에서 받은 게 너무 많았습니다. 그 은혜로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한성하람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교회가 아픔을 당했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매정교회는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대형 산불로 성도들의 주택과 산업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참담한 상황 속에서 고위한 장로님을 통해 보내주신 사랑이 마을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과 사역을 위해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받은 한 끼의 따뜻함은 시간이 흘러 교회를 살리는 손길로 되돌아왔다.

산불로 전소된 매정교회에 화재 복구 선교 성금 전달
▐ 도망친 뒷산에서 세운 각오
가난한 집안 형편 속에서 부모는 고위한 장로가 일찍 공장에 나가 돈을 벌기 원했다. 5남 2녀 중 둘째였던 고 장로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 부산 신발 공장에 취업할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 냉정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당시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다른 판단을 내렸다.
“선생님이 부모님께 말씀하셨어요. ‘위한이는 공부시키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요.”
공부를 놓을 수 없었다. 고위한 장로는 부모 몰래 중학교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집으로 돌아온 날, 어머니의 꾸중은 거셌다. 고 장로는 뒷산으로 몸을 피했다. 뒷산은 도망의 자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선택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자리였다.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구나.”
고위한 장로는 어렵게 중학교에 진학했고, 등록금이 없어 조합의 자금 대출을 받아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이후 수많은 선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던 힘은 이때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 서울 상경, 책임이 더해진 시간
고위한 장로는 군복무를 마친 1977년 스물네 살,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춰 주신 양복을 입고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연고도 보장도 없었다.
“서울 말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이나 대구가 아니라 무조건 서울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내려오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첫 직장은 여동생이 서울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집 주인의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서울 중구 오장동 재봉사회사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서 하루에도 수백 박스 재봉사를 나르고 패킹해 납품했다.
“출근하면 하루 종일 재봉사 나르는 일만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일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묵묵히 버틴 성실함은 영업부 발령으로 이어졌다. 서울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아버지와 하나뿐인 형이 연이어 소천했다. 상실은 곧 책임이 됐다. 고위한 장로는 가장이 되었고 월급은 고향의 동생들에게 보냈다. 생활은 빠듯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일을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맡은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제 인생의 자산입니다.”
▐ 공장 없이 시작한 한 우물
영업부에서 거래처와 신뢰가 쌓이자, 고위한 장로에게 직접 사업을 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본도 공장도 없었지만 고 장로는 현장에서 배운한 가지를 믿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결국 길을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공장이 없다고 일을 못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건 약속이었어요. 봉제 쪽으로 가면 돈이 된다는 말도 많았고, 부동산이나 투자 이야기도 있었죠. 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재봉사는 사람의 삶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봤어요. 단순한 실이 아니라, 제 청춘이 담긴 일이었어요.”
번 돈은 다른 데로 새지 않게 했다. 설비에 다시 투자했고, 공정 하나하나를 점검했다. 더디게 가는 길이었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공장도 없던 시절에 배운 게 있어요. 사람을 속이지 않으면, 일은 결국따라온다는 거예요.”

▐ ‘하람’이라는 이름, 신앙과 경영의 기준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개인사업을 법인으로 전환해야 했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였다. 고위한 장로의 마음에 남은 단어는 ‘하람’이었다. ‘하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이름이 단순한 상호가 아니라 삶과 경영을 붙드는 잣대가 되기를 바랐다.
“법인으로 바꾸면서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목사님이 지어주신 ‘하람’이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회사 이름을 달고 나니까 자꾸 제 자신에게 묻게 되더라고요. 이 선택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가.”
1989년, 한성실업은 법인 전환과 함께 ‘한성하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거래처를 대하는 태도, 돈을 쓰는 방향,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이름이 기준이 됐다. 손해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서두르지 않았고, 당장의 이익보다 오래 갈 길을 택하려 했다.
“신앙은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회사에서 내리는 결정이 제 신앙을 보여준다고 봤어요. 돈을 벌기 위해 굳이 안 해도 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이름 하나 붙들고 버텼어요.”

베트남 하노이 공장(2005년 준공)

베트남 호치민 공장(2007년 준공)
▐ 하루의 시작 하나님 앞에 드려
중요한 결정들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붙든 힘은 ‘하루의 시작’에 있었다. 고위한 장로와 아내 윤선희 권사는 새벽기도를 소중히 여긴다.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고민이 이어지던 밤에도 새벽을 비워 두지 않았다. 기도는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라 기준을 다시 세우는 자리였다.
“특별한 기도를 한다기보다, 하루를 하나님께 먼저 올려드리는 시간이었어요. 결정을 앞두고 따로 상의하지 않아도, 기도하고 나면 방향이 같았어요.”
조용한 습관이 삶 전체를 지탱해 왔다. 이 신앙의 습관은 아내 윤 권사와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쌓아온 삶의 리듬이기도 했다.
▐ IMF 외환위기, 과감한 선택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고위한 장로의 삶과 경영을 정면으로 흔들어 놓았다. 회사가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공장 분양을 진행하던 건설사가 부도 위기에 놓이며 상황은 급변했다.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만류했고, 분양을 받았던 업체들 역시 하나둘 발을 뺐다.
계산기를 두드리면 물러서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고위한 장로의 마음에는 하나의 기준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 선택 앞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였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갈림길 이었어요. 그 돈은 제 전 재산이었거든요.”
고위한 장로는 가족과 함께 2박 3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해답을 얻기 위한 기도라기보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기도하면서 계속 물었어요. 이 상황에서도 ‘하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가.”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마음의 결론은 분명해졌다.
“넣자.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하나님을 믿고 가보자. 그때 배웠어요.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라는 것을요.”
고위한 장로는 분양금을 그대로 넣었다. 그 선택으로 자금이 막혔던 공사는 이어졌고, 공장은 완공됐다. 이후 한성하람은 구로동 에이스테크노타워 1호 입주 기업이됐다.
IMF는 많은 기업을 무너뜨렸지만, 고위한 장로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위험을 감수해 본 첫 경험으로 남았다. 이 시기를 지나며 그의 경영은 성공을 향한 계산이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 내리는 결단의 연속이 됐다.
▐ 공정을 완성하다, 염색공장 설립
IMF 이후 고위한 장로는 재봉사 생산의 본질을 다시 보았다. 핵심은 염색이었다.
“재봉사는 염색이 핵심입니다. 실 품질은 염색에서 거의 결정됩니다.”
염색은 규제와 설비,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만류도 있었다. 다만 고위한 장로는 외주로는 품질과 신뢰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포천 일대에 염색공장을 세웠고 2002년 8월 30일 준공예배를 드렸다. 한성하람은 공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를 갖추게 됐다.
“공장이 생겼다고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더 무거워졌어요. 더 많은 사람의 삶이 연결돼 있다고 느꼈어요.”

한성하람 포천 염색공장
▐ 낯선 땅에서 맞은 시험
해외 진출은 또 하나의 선택이었다. 고위한 장로는 베트남 하노이(2005년 준공)와 호치민(2007년 준공)에 공장을 세웠다. 설립 시기는 달랐지만 두 공장은 한성하람의 글로벌 생산망을 지탱하는 핵심 거점이 됐다. 국내에서 쌓아 온 품질 기준과 공정 원칙을 해외 현장에 그대로 옮기는 것이 목표였다. 고위한 장로에게 베트남 현지 공장은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일터를 통해 삶과 신앙이 함께 드러나는 선교지였다.
현재 한성하람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내수와 수출을 함께 감당하는 실 전문기업으로, 하노이와 호치민을 중심으로 200여 개 거래처와 협력하고 있다.
“자랑이 아닙니다. 버텨온 결과입니다.”
물론 글로벌 생산 거점을 세우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을 믿고 맡겼다가 분쟁이 생겨 경찰 조사와 고발, 재판으로 이어졌고 고등법원까지 가는 긴 싸움이 됐다. 결국 승소로 마무리됐지만 이 과정을 통해 고위한 장로는 “해외 사업일수록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한성하람 베트남 창립 제20주년 기념식(25년 7월)
▐ 가장 낮은 자리에서, 교정선교
고위한 장로 신앙은 교회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랫동안 붙든 사역 가운데 하나가 청송교도소의 교정선교다. 현장에서는 회장도 장로도 의미가 옅어진다.
“안에 계신 분들도 다 사람입니다. 실수한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호칭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교정선교는 가르치는 자리보다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판단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위한 장로는 2001년 12월 2일 장로로 취임해 예성교회를 섬겼고, 2023년 10월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원로장로 추대 이후 고위한 장로는 확장보다 ‘지킴’을 말한다.
“잘했다는 말보다 기준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이름값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하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 말입니다.”
고위한 장로의 삶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가난에서 출발해 수없이 흔들리고 넘어질 뻔한 순간들을 지나왔다.
다만 한 가지는 끝까지 붙들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기준이다. 섬유 현장과 해외 공장, 교정선교와 가정의 자리까지, 고위한 장로는 오늘도 그 기준을 삶으로 지켜내고 있다. 이 기준 위에 세워진 삶은 ‘한성하람’이라는 이름 안에서 조용히 다음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박충인 기자

실 공정을 확인하는 고위한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