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는 자살을 너무 오랫동안 개인의 내면 문제로 국한(局限)시켜 왔다. 이미 19세기 말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자살은 개인의 병리 이전에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통합이 약화되고, 삶을 지탱하던 규범과 신뢰가 붕괴될수록 자살률은 높아진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과도한 경쟁, 불안정한 노동, 파편화된 공동체, 그리고 실패에 대한 잔혹한 응징이 일상화된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에게만 ‘마음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은 책임의 전가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20여 년간 자살예방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 계획과 항목은 정교해졌지만, 자살률 감소라는 결과는 번번이 실패했다. 이는 정책의 방향이 틀렸다기보다는 실행의 지속성과 현장의 온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 말해주듯, 생명 안전망은 단 하나의 제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예산, 인력, 제도, 지역 공동체, 종교와 시민사회의 협력이 동시에 작동하지 않으면 시스템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붕괴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다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의 성공을 축하하는 나라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 사람을 끝까지 찾아 나서는 나라였다. 아흔아홉의 양을 두고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목자의 비유는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존엄의 논리다. 하나님 나라에서 한 생명의 가치는 통계로 환산되지 않으며, 쓸모나 성취로 평가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로 존귀한 것이다.
자살 문제를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극단적 선택을 도덕적으로 단죄하거나 신앙의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왜 이 사람은 끝까지 혼자여야 했는가”,“왜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는가”,“공동체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묻는 일이다. 이는 회개를 개인에게만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음을 관리하는 나라가 아니라 생명이 머무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나라이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는 사회, 실패해도 존엄이 훼손되지 않는 문화, 약함을 드러내도 배제되지 않는 공동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다. 자살 예방은 결국 ‘죽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살 수 있게 하라’는 요청이다.
국가가 자살을 사회재난으로 규정하는 정책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을 넘어선 실천이다. 정책은 차갑지 않아야 하고, 제도는 숫자보다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버겁더라도, 당신을 도울 사회가 있다”는 신호를 반복해서, 일관되게 보내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공적 구현이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 불행은 언제나 한 가지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그 결핍이 생기기 전에 다가가고, 무너진 조건들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한 생명이 다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지 않다’고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곳에서 비로소 국가의 책임과 하나님 나라의 소명이 만난다. 우리 사회에서 국민안전인성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살을 줄이는 사회는 단지 통계가 개선된 사회가 아니다. 가장 약한 사람까지도 끝까지 포기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그 사회를 향한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는 과연 생명이 머무를 수 있는 나라에 가까워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적 재난으로서의 자살을 넘어, 생명이 머무를 수 있는 사회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회개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야 한다.
김성제 시인
<소방청 인천부평소방서, 재난과학박사, 우리응답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