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종로 (24) 탑골공원 너머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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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와 청년운동으로 민족을 깨운 이상재를 다시 만나다

이상재 동상(종로3가 종묘 공원)

탑골공원을 돌아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것은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던 공원에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한용운의 기념비는 있는데 사실상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어떤 표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은 비단 탑골공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적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업적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곳에 그러한 설치물이 없거나 혹 있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공통적인 문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가 이 방면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역사를 지켜내는 일에 전문 기관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국비로 조성되는 공원에 당연히 조성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에도 몰라서, 또는 무관심 때문에 제외되거나 조성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곳이 탑골공원 앞을 지나서 종로 4가 방향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종묘에서다. 종묘 앞 주차장을 지하로 만들면서 접근성이 용이해졌고, 도심에서 만나기 힘든 공간이 쉼을 허락하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조차 창경궁은 가봤어도 이웃해 있는 종묘를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긴 하다. 

종로 3가에서 4가 사이에 종묘가 있다. 그리고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과 종로 사이에 조성된 공원이 종묘광장공원이다. 그 공원 왼쪽에 자그마하게 조성된 또 다른 이름의 공원이 있다. 그것이 ‘월남 이상재 선생 공원’이다. 그러니까, 한 공원 안에 두 공원인 셈이다. 사실 공원 이름은 구별되어 있지만 현장에서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 공원 안에 두 공원인 것은 분명하다.

‘월남 이상재 선생 공원’ 이름을 찾아가면서 아쉬웠던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다. 공원 이름이 있으니 그곳에서 월남의 동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상재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에 직접적으로 서명을 하거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끌고 있던 YMCA와 회원들의 동참은 분명했다. 그는 만세운동 이후에도 민족의 계몽과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힘썼다. 그랬던 그의 모습을 아쉽지만 여기 종묘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비록 탑골공원은 아니지만 근처에 있는 또 하나의 공원인 종묘광장공원 안에 있는 월남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도심에서 만나기 어려운 공간에 자리한 선생의 동상과 주변에 마련된 선생의 업적을 담아서 만든 부조는 그를 잊고 살아온 우리의 마음에 다시 선생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눈에 띄게 서 있는 선생의 동상은 노년의 모습이지만 기백이 살아있고 그의 성품까지 담긴 듯하다. 그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노구를 이끌고 이 나라 청년들을 깨우면서 당당하게 서 있는 선생의 모습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선생의 동상 뒤에는 선생이 주도했던 업적을 부조로 양각한 작품이 세워져 있다. 

선생에 대한 사항은 관련된 곳을 찾을 때마다 조금씩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동상과 부조를 만들면서 정리해 놓은 것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동상과 부조가 세워진 것은 아쉽게도 정부에서 한 것이 아니라 서울YMCA가 중심이 돼서 이상재 선생 동상 건립위원회를 구성해 만들게 되었다. 따라서 조성된 부조와 동상에는 선생의 활동사항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생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1850년에 태어났고,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해서 개화된 일본의 모습을 보고 돌아와서 개화자강(開化自强)을 위한 선구자로서 역할을 자원하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서재필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데 주역으로 동참했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개화구국(開化救國)을 목적으로 하는 개화운동을 주도했다.

1898년에는 자주독립수호 및 구국운동을 선언하면서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고종과 수구세력의 밉보임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투옥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그는 단지 조선의 개화가 미래를 위해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입장에서 개화파 지도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복음을 소개받고 개종을 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다. 선생은 러일전쟁 당시 출옥하게 되었고, 출옥하자마자 개종한 그의 모습은 크리스천이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남은 일생을 살았다.

출옥한 다음에 그는 곧바로 조선의 미래를 청년들에서 확인했고, 그들을 이끌어가고 교육시킬 수 있는 방편으로 YMCA를 선택했다. 그리고 청년들과 국민들을 대항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YMCA 내에 학관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YMCA를 이끌고 있던 그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만세운동 이후 1924년에는 70세가 넘은 노인이지만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을 조직해서 초대 총재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을 주도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일에 나섰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해놓고 그의 생애는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많은 시대에 한 지식인으로 번뇌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국민들에게는 좌절하지 않도록 자존감을 일깨우는 일을 했다.

선생의 삶은 민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국가적, 사회적 현실을 보면서 선생을 생각하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시대의 지도자로서 한 사람을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 확고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선생을 조명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왜일까?

이곳에 조성된 부조와 동상은 1986년 4월 10일 이상재 선생 동상 건립위원회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왕 종로를 돌아보는 여정이라면 종묘 앞에 조성된 공원에서 이상재 선생을 만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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